(322)하늘의 전쟁(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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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전투 비행전대>(5)
한국 공군이 단독으로 공지협동 작전을 전개하여 국군 제1군단을 직접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10월28일부터였다. 그러니까 51년10월11일에 적 보급로 차단이나 도시 공격에 독자적으로 출격한지 1년만에 또 하나의 큰 발돋음을 한 것이다.
즉 지상우군으로부터 공격목표에 대한 지원요청을 받는 즉시 유도기(모스키토)가 목표 상공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고 기지에 연락하여 전투기대를 불러낸다. 출동한 전투기대는 전술공군 통제반(TACP)과 유도기의 안내로 적의 벙커·동굴·보급 집결소 등을 공격 분쇄하는 것이다. 특히 유도기 조종사들은 전투기 조종사 못지 않게 위험을 무릅쓰고 하루에도 몇 차례 출동해야 했으며 공지협동 작전의 성패는 이들 손에 달렸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지협동 작전은 한국군 장기>
제10 전대가 춘천의 미 기지에 파견근무하고 있는 아군 유도기 조종사들과 협조하여 전개한 공지협동 작전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과는 351고지 공격 작전이었다. 동해안의 고성 남방 10리에 위치한 이 고지는 51년 7월께부터 휴전 조인 때까지 피아 간에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뀐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이 벌어졌다.
▲손주현씨(당시 모스키토 조종사=중위·현 공군본부 참모=준장·42) <52년 말 춘천에 있는 미 공군전술통제부대에서 한국군 조종사 파견요청이 있을 때 내가 추천을 받았어요.
이 부대는 공군의 공격목표를 정찰로 확인해서 가르쳐주고 또 지상군의 요청이 있으면 전투기를 유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어요, 53년 초에 우리 공군이 육군의 요청으로 동해안의 351고지를 대대적으로 폭격했는데 나로서는 이 때의 유도임무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고지주인이 바뀌어 전선구별에 극도로 신경을 썼지요. 아군의 포판과 모스키토에서 쏘는 로키트 신호 등으로 적 진지를 표시해 주었는데 다행히 오폭은 없었지요.
아뭏든 53년3월부터 휴전될 때까지 어찌나 351고지를 많이 폭격했는지 산이 허옇게 됐고 고지가 낮아질 지경이었으니까요. 지정된 목표나 새로운 상황 등을 발견하려고 하도 전선상공을 왕래했기 때문에 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그곳 지리는 훤합니다.
굴속에 이상한 것이 보여 자세히 보니 은폐된 적 탱크여서 로키트로 쏘려다 적탄에 맞았어요. 겨우 간성 비행장에 불시착해서 살았는데 이날이 스탈린 죽은 날이어서 더욱 잊혀지지 않는군요.>
▲김만용씨(당시 제10전대 조종사=중위·현○○학교장=대령·41) <52년 후반부터 우리 공군이 전개한 공지협동 작전 성과는 볼만했어요. 이 공지협동은 처음 미 공군이 시작했지만 오폭 등의 사고가 빈발하여 큰 효과가 없었지요. 우리 공군은 지형에 밝고 유도기와의 교신이 잘되고 피아식별이 정확한 이점이 있어 이 작전이 성공한 거지요. 공지협동 작전에는 유도기가 정해준 목표물을 일렬로 꼬리를 물고 들어가 때리는 방법과 목표물을 1대가 공격하는 동안 3대는 공중서 돌면서 대기하다가 차례대로 내려가 치는 근접 지원이 있어요.
어느 방법이든 우리가 나가면 목표물을 적중하니까 유도기들은 날개를 흔들며 좋아했어요. 춘천의 미군 기지에 파견 나간 백정현 소령은 내가 나가면 『만용아, 밑에서 내 유도기에 포를 쏘아대고 있는데 빨리 때려라』고 해요. 수직강하해서 로키트로 적 고사포를 파괴시켰더니 『저놈들 다 죽는다 잘했다』고 환성을 지릅니다.>
▲천영성씨(당시 제10전대 조종사=중위·현 공군사관학교 부교장=준장·43) <52년9월에 나는 351고지 공격 때의 공으로 화랑무공무장을 받았습니다.

<우수했던 우리 유도기 조종사>
그 때 나는 4개 편대 중 제4파로 출격하는 김직한 소령 편대의 4번 기를 몰고 들어갔어요. 고지 상공에 이르니 이미 앞서 들어간 편대의 폭격으로 산꼭대기가 시뻘건 화염에 휩싸여 있습니다. 고지를 내려다보니 포 진지 구멍이 뚜렷이 보이데요. 이날 우리 공격목표는 351고지의 적 포 진지에 있는 4개의 구멍을 완전히 파괴, 메우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구멍 한 개는 잘 보이지 않아요. 편대군장 장지량 소령은 제4편대의 4번 기가 나머지 구멍을 책임지라고 명령합디다. 나는 수직강하를 하면서 구명을 향해 폭탄을 투하하고 올라와 내려다보니 두 개에 적중해 구멍이 무너져 버렸어요.
다시 선회하면서 로키트 포로 남은 구멍에 갈겼더니 호 안의 포가 폭발해서 이것도 막혀버렸어요. 적의 포진지가 침묵하니까 지상의 우군이 진격하는게 보이더군요. 이튿날 중학교 때 은사인 1군단장 이형근 소장이 강릉 기지에 와서 격려해 주어 퍽 기뻤습니다.>
▲백용삼씨(공사 1기생·현 공군대학교 총장=준장·46) <휴전을 한 달 남짓 남겨두고 351고지 바로 옆 능선아래의 적 보급소를 폭격한 일이 있어요. 권중하 대위가 탄 유도기가 우리 편대를 유도했는데 능선아래 소나무가 그루 있는데 그게 목표였어요.
1, 2번 기가 급강하해서 폭탄을 투하하니, 화염이 능선을 다 덮습디다. 내가 4번 기로 폭격하려는데 유도기에서 첫 목표는 완전히 파괴됐으니 능선 아래를 때려 달라고 합디다. 일단 공중 대피했다가 유도기에서 가리켜 준 목표에 폭탄을 투하하고 치솟아 오르니 불꽃 속에서 또 불꽃이 뭉개 구름처럼 피어오르데요. 여러 번 출격했지만 그 같은 장관은 처음 보았습니다.>
▲백만길씨(공사 1기·현 ○○부대단장=준장·45) <나는 주로 중동부 전선에 지원 출격했는데 351고지 폭격 때 가장 치열한 적의 대공포화를 받았어요. 이 공격에서 우리 동기로는 임택순 중위가 제일 먼저 희생당했지요. 53년3월6일인데 임 중위는 77호기를 타고 나갔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어요. 그는 바로 내 옆 침대에서 기거한 전우였는데, 그 슬픔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더군요. 때부터 조종사들 사이에는 화투놀이에서 말하는 「땡」붙은 비행기를 싫어하는 버릇이 생겼읍니다.>
▲임???섭씨 (당시 제10전대 조종사=중위·현 공군본부참모=준장·43) <나는 1백56회 출격했는데 351고지 공격이 가장 기억에 남고 또 슬픔을 맛보았어요. 이 고지 쟁탈전이 어찌나 치열했는지 조종사치고 안나가 본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내가 편대장으로 나간 때인데 351고지의 목표를 폭격하고 급상승하면서 보니까 2번 기의 임택순 중위가 내려 박히면서 공격하는데 불꽃이 확 일어나요.< p>

<"착륙 때까지 긴장 풀지 말라">
나는 임 중위가 탄약고라도 명중시킨 줄 알고 기분이 좋았어요. 폭격을 끝내고 동해로 빠져 나와 보니 임 중위 비행기가 없어요. 3, 4번 기를 남겨두고 폭격지점에 돌아가 선회해 보니, 산골짜기에 비행기 날개 부서진 게 보입디다. 원통하고 분해서 남은 기관총을 있는 대로 갈기면서 돌아다니니까 유도기에서 『너 미쳤느냐, 죽으려고 그러느냐』고 무전으로 야단입디다. 기지로 돌아와 조종사들과 임 중위가 담당 정비사들이 모두 울음을 터뜨렸지요.>
다음은 전투 조종사로서 교훈으로 삼을만한 두 가지 사례 외 이야기.
▲이찬권씨(당시 10전대 조종사=중위·현 공군본부 참모=대령·42) <전대장 강호윤 중령은 편대가 돌아올 때는 착륙 때까지 긴장을 풀지 못하도록 굉장히 엄하게 지시했어요. 폭격이 끝났다고 방심했다가는 사고가 나기 쉽다고 누구보다도 강조했어요.
내가 31회 출격을 끝내고 활주로에 내렸는데 한참 있다보니 비행기가 활주로 밖으로 나가고 있어요.
깜짝 놀라 급히 조정을 해 제자리에 데려놓았지만, 하마터면 개죽음을 할 뻔했어요. 나는 53년2월16일에 1백 회 출격 기록을 세웠는데 지금도 착륙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말라는 교훈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김상광씨(조종간부 2기·현 공군본부 참모=대령·43) <그때 강릉 기지는 활주로가 좁아 이착륙에 지장이 많았어요. 동기생 2명이 이륙 때 부딪쳐 죽었고, 53년7월 초에 고광수 중위가 역시 바다에 추락했어요.
그리고 계기 비행훈련을 못 받아 평양 폭격서 돌아오다 혼났고, 휴전 후지만 큰 사고가 난 일이 있어요. 54년3월4일인데 조항식 중위가 편대장이고 내가 2번 기, 3번 기는 김영호 소위, 4번 기가 이영식 소위로 삼척 상공서 비행훈련을 했어요.
이때 강릉 상공에는 구름이 드문드문 해서 시계 비행이 충분했는데 드릴을 좋아하는 편대장 조항식 중위가 고도를 9천 피트로 올리더니 구름 속을 헤치며 차차 아래로 내려갑디다.
구름 사이를 누비며 따라 내려가는데 이제는 구름밖에 안보여요. 구름을 뚫다가 요기들과 헤어져 간신히 기지로 돌아왔는데 다른 3대는 실종됐어요 바다에 빠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계기 비행훈련만 받았더라면 이런 참사는 모면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한편 강릉 제10전대는 53년2월15일에 전투비행단으로 확충되어 적후방 보급로차단과 도시공격, 그리고 공지협동작전에 한참 열을 올리게 됐는데 휴전의 먹구름이 드리우게됐다. 휴전 조인 날 제10전비단 조종사들은 몇 번이고 출격하여 민족의 울분을 폭격과 기총소사로 달랬다.
▲김중보씨(공사 1기·현 공군본부 참모=소장·42) <53년7월27일 우리 공군은 최대의 출격을 감행했습니다. 오늘 아니면 더 이상 적을 때려부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밥도 안 먹히데요. 나는 주스와 빵으로 간단한 식사만 하고 이날 3회 출격했어요. 우리들은 피만 흘리고 통일도 못하는 휴전의 울분을 출격으로 달랜 겁니다. 정비사들 심경도 마찬 가지어서 비행기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정비를 했지요.>

<휴전 때까지 7천8백 회 출격>
▲이관모씨(공사 1기·현 ○○부대단장=준장·43) <휴전되는 날 351고지 폭격에 나갔습니다. 공식 출격기록이 그 오전까지 3회니까 81회였는데 나는 79회 인줄 알고 80회 채우겠다고 이날 4회 출격을 희망했어요. 아침을 굶고 오전에 3회 출격하고 돌아와 주스만 마시고 4회째 나가려는데 옥만호 작전과장이 몇 번째냐고 물어요. 세 번째라고 했더니 『너 네 번째야, 또 가면 지쳐서 사고 나니 가지마』하면서 다른 조종사를 보냅디다. 아무튼 조종사들은 마지막 출격 날이라고 모두 정도 나갔어요. 대부분이 비장한 생각에서 울면서 출격했습니다.>
한국 공군이 1951년10월11일 독자 출격 개시이래 53년7월27일의 휴전 조인까지 5천3회, 공지협동작전에 2천8백15회로서 도합 7천8백18회였다. 휴전으로 적지 출격의 날개는 묶였지만 한국 공군의 『하늘의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알림=기사 넘쳐 「중요일지」 쉼.
※알림=이번 회로 6·25의 한국 공군 활약상은 끝내고 다음 회부터는 미 공군의 활약상을 대충 다룰 계획입니다.
한국 공군 취재에 협조해 주신 관계인사들과 공군본부 정훈감실에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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