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아도 될 사람들|김학수<외대교수·노문 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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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하나 둘 주의 사람들이 사라져 간다. 갖가지 질병에 죽어 가는 사람들 고혈압에 쓰러지는 사람, 불의의 사고로 횡사하는 사람, 그 중에는 이국 땅에서 변사한 스승도 있고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동료들도 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주위에는 생사람을 산채로 잡아가는 기이한 유행병이 만연되고 있다. 질병도 횡사도 요절도 아닌 이민이란 유행병이.
사실 몇 년 전 만 해도 이민은 그다지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미국에서의 이민 코타 제가 완화되면서부터 급격히 그 수효가 증가되고 국내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몇몇 인사들이 이민을 가게됨으로써 이 문제는 관심의 초점이 된 것 같다.
일제시대의 이민은 조국을 빼앗긴 설움에 못 이겨 왜놈들의 박해에 못 이겨 정든 고향을 떠나는 게 대부분 이었다. 그러나 요즘 그 대부분 이 교육정도로나 재산정도로 보아 적어도 우리 나라에서는 중간 레벨 이상의 계층들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요새의 이민은 확실히 쪽박을 차고 북간도로 떠나던 일제시대의 유랑민들하고는 그 성격이 판이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가지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있다. 조국을 잃었던 일제시대나 지금이나 간에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는 데는 매한가지다. 다시는 밟지 못할지도 모를 내 조국, 내 땅을 버리고 말이다.
조국이란 이미지와 관련해서 몇 가지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다.
『의사 지 바고』로 노벨상을 받은 파스테르나크는 출국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대한 인세와 화려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서방으로의 망명을 거절했다. 70년에 노벨상을 받은 솔제니친도 소련을 떠났다가 귀국 비자가 나오지 않을 까봐 상을 받으러 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소련은 1984년까지 존속할 것인가?』를 써서 비밀경찰에 체포된 아말리크는『당신은 소련을 떠나고 싶지 않은가?』라는 CBS특파원의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정치제도에 대한 불만은 많지만 소련은 내가 태어난 나라다. 결코 떠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만약 태어나기 전에 선택이 가능했다면 나는 차라리 다른 나라를 택했을 것이다.』
파스테르나크나 솔제니친의 경우 그리고 시베리아로 끌러가면서 까지도 조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아말리크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이것은 지성인으로서의 하나의 사명감 일게다. 그들에게 있어 조국은 그들 개개인의「나」와 다름없다. 조국이 썩어 뭉크러졌건 문 들어졌건 그들은 자기 조국 속에서「자아」를 통감한다. 아니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으면 있을수록 조국의 위기를 구해낼 의무감도 자기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또 그러기에 혼자만의 자유를 위해 영국으로 망명한 동료작가 쿠즈네초프에 대해서 조국에서의 투쟁을 방기한 변절자로 낙인을 찍고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조국 관을 우리 나라 이민들에게 결부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과연 조국을 떠나는 사람들 중에 떠나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는 걸까? 또는 이민이라는 것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이민만 가면 돈이 저절로 굴러들어 온다는 식으로 말이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한마디만 조언을 하고싶다. -비록 쪽박 대신 암달러를 두둑이 바꿔 쥐고 떠난다 해도 조국을 떠나는 유랑민의 신세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고.
요는 이민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자세와 마음가짐이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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