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질년 '71…사건의 주역을 찾아|남북적십자회담 한적파견원|흥분과 긴장속에 사명감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26년만에 처음으로 북쪽사람들과 공식접촉을 가졌던 윤여훈 여사(34·대한적십자사국제부상사)는 다섯차례의 「메신저」의무를 다하는 동안 줄곧 긴장속에 지냈다고 말했다.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극적인 8·12선언을 통해서 남북적십자사회담을 제의하고 그 파견원으로서 이창렬씨와 둘이 임명받았을때 먼저떠오른 생각은『어려운 일을 맡았구나』하는 것이었다고 되새겼다.
그러나 지난 8월20일 처음 파견원을 받았을매는 어쩌면 내가 하는 일이 남북통일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흥분과 건강 그리그 사명감이 느껴졌으나 본 회담 대표가 아닌 「메신저」 역할에서조차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나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파견원으로서 5차례 북쪽파견원과 접촉하는동안 가장 어려웠던일은부여된 임무가「메신저」국한되어 있었는데도「매스컴」이나 국민모두가 너무나 큰 기대를걸고 바라보기 때문에 말조심 하는 일이었다고 틸어놓았다.
그러나 국민들의 남북이산가족찾기에 건 기대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았고 꼭 성공시켜야 할 책임을 느껴 주어진 테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한번은 퇴근 길에「택시」를 탔는데 고향이 이북이라는 운전사가 「파견원 윤여훈」인 것을 알아보고 『수고 많습니다. 이북출신 운전사들이 윤여사에게 차한대 사드리기 운동을 벌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산가족찾기가 얼마나 국민의 절실한 문제인가를 새삼 느꼈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일도 많았다고 했다. 한가지 예로 판문점에 갈때의 옷차림. 보도되는 사진을 본 국민들이 매일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도 관심아닌 관심거리가 되었는데 사실은 5번중 3번은 평상시 출근복이었고 2번은 외교관으로서의 복장이었으나 그때그때 변명할수도 없었다는것이다.
또 한번은 3번째 북적파견원과 접촉했을때에 발언한 일부가 약간의 오해를 샀을때였다고.
그날 회담장 안은 질서가 너무 흐려 시끄러웠고 북쪽 파견원들은 이쪽엔 대답을않고 앵무새같이 되물어오는데서 약간 언성이 날카로와졌던 것이 국민들로부터는『신경질 적이다. 희담 분위기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는 등 비난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때는 북쪽파견원들로부터 상식적인 반응이 없었던 때문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또한 파견원은 처음부터 「메신저」인데도 「마이크」를 들이대고 말하라는데는 정말 혼이났다고 말했다.
그래서 대개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받지않고 있었는데 이때문에 공군에 근무하는 남펀 서쇄구소령(34)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다쳤다는것을 알려온 군당국의전화도 한참동안 받지않아 조난소식을 조금늦게 알았다는 것. 윤여사는 회담의 「메신저」역을 맡은 도중에 남편이 훈련중 탑승기가 추락, 부상으로 모 기지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던것이다.
8월20일에서 9월16일까지 윤여사는 공사(공사)로 무겁게 어깨가 눌렸다. 남편이 무사하게 퇴원할때까지 퇴근후 비행기로 멀리 남편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갔다가 다음날 첫 비행기로 다시 상경, 이같은 비랭기 출퇴근 간호를 거의 매일 하면서도 적십자사일에 지각이나 조퇴를 한적은 없다고 했다. <채영창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