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엉킨 교육과정 개선 어떻게 … 교사들 의견 들어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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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놓고 좌우 이념 논란이 한창이다. 정치권·학계·시민사회가 양쪽으로 갈려 특정 교과서·집필진을 ‘우편향’ ‘좌편향’이라고 지목하며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계에선 일반적인 교육과정과 교과서 내용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소모적인 이념 논쟁 대신 잦은 교육과정 개편으로 뒤엉킨 교과서 전반의 문제를 개선하려는 논의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교총의 ‘새교육개혁포럼’ 토론회가 그런 자리였다.

역사 배경 모르는데 양반전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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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 박지원이 쓴 ‘양반전’은 양반 신분을 사고팔던 조선후기 신분제의 폐단을 풍자한 소설이다. 강원도 정선의 한 상민이 양반 신분을 쌀 1000석에 샀다가 양반 문서에 적혀 있는 허례허식과 지켜야 할 법도에 질려 스스로 양반되기를 포기한다.

 조선 후기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양반전을 학생들은 대개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 시간에 배운다. 학생들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까. 이날 토론회에 나온 김향숙 인천 용현여중 수석교사는 “대개 양반전에 대해 서너 시간 수업을 하지만 제대로 따라오는 아이들은 한 반에서 열 명도 안 된다”고 털어놨다. 역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거의 없는 탓이다.

 “중학생은 2학년 때부터 한국사를 배우는데, 1학기엔 조선 후기까지 진도가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에요. 학생은 배경지식이 없으니 이해하기 어렵고, 국어 교사는 조선사를 따로 가르치기 버겁죠. 역사를 먼저 배운 뒤 양반전을 읽으면 훨씬 이해가 될 텐데, 왜 이렇게 돼 있는지….”

 ‘국가교육과정과 교과 난이도, 학습량의 상관관계’를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현직 교사들은 현행 교과서와 교육과정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먼저 학생 수준에 비해 어려운 교과서가 도마에 올랐다. 초등학교 사회과목은 5학년 한 해 동안 선사시대부터 현대사까지 모두 배운다. 1년 동안 역사를 집중학습한다는 취지지만 교사들은 회의감을 나타냈다. 조호제 서울 버들초 수석교사는 “연대사 중심의 교과서에 맞춰 수업을 하다 보면 아이들은 선사시대만 지나도 흥미를 잃기 일쑤”라고 전했다.

 수학을 실생활 속 이야기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링’ 방식이 도입된 초등학교 수학 교과서도 상황이 비슷하다. 2학년 1학기 덧셈과 뺄셈 단원에는 ‘개미집에 알이 83개가 있었다. 여왕개미가 알을 더 낳았는데 알이 90개보다 적었다. 최대 여왕개미는 알을 몇 개 더 낳았는가’라는 문제가 나온다.

어른도 힘든 스토리텔링 수학

스토리텔링 수학을 10년 이상 가르쳐온 박성은 경기 고양외고 수석교사는 “어른이 읽어도 언뜻 이해되지 않는 이 같은 문제들이 많이 쓰이고 있다. 자연과학적 이론을 배경으로 하는 수학에 억지로 스토리텔링을 도입하다 보니 오히려 학생들이 더 어렵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양반전처럼 연관된 내용을 배우면서도 과목에 따라 배우는 시기와 진도가 크게 달라 학습 효과가 반감되는 경우도 많다. 고양외고 박 교사는 “중1 과학 시간에 배우는 마찰력·등속운동을 이해하려면 일차함수 그래프의 기울기를 알아야 하는데 이건 중2 수학에서 배우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이원춘 안산 성호중 수석교사는 “중3 학생들은 과학 과목에서 전기(電氣)의 개념을 배우기도 전에 기술가정 시간에 전력(電力)·전력량(電力量)부터 배우는 거꾸로 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성(性) 관련 단원은 중학교 과학과 기술가정, 고교 기술가정에서 반복해서 배운다. 하형숙 인천 계산여중 수석교사는 “같은 내용을 다른 학년, 다른 과목 수업 시간에 또 배우다 보니 학생들이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교사들은 잦은 교육과정 개편이 교과서 체계가 뒤엉킨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교육과정은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동안 네 번 개정됐다. 황보근영 고양 행신중 교사는 “어느 중학교 도덕교사는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도덕 교과서가 3권에서 2권으로 줄어든 사실을 모른 채 2학년 때 도덕2 교과서까지 진도를 다 나가버렸다”고 전했다. “교사들조차 교육과정의 잦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4년간 교육과정 매년 바꿔 혼선

 최근의 한국사 교과서 논쟁에 대해 이건홍 안양 백영고 교사는 “역사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진영 논리로 나눠 상대편을 몰아붙이는 태도는 교과서, 교육과정의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안양옥 교총회장은 “교과서·교육과정의 개편은 정치적 잣대가 아니라 교육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교사·교육학자 등 전문가들이 모여 숙의하고 합의를 도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인성·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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