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경시한「드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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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유럽 문단의 3대 거인으로「드골」은 문호 「셰익스피어」를 제쳐놓고「샤토브리앙」(이). 「단테」(이), 「괴테」(독)를 들었다. 「드골」은 이들을 세계문화정신을 계승시진 사람들이라고 극찬했다.「드골」의 이 같은 평가에 대해 평론가「조지·스타이너」는 최근「더·타임스」에서 일고의 가치 있는 관점이라고 논평하고 있다.
생존시 한「인터뷰」에서 즉흥적으로 말한「드골」의 대답은 어떻든 흥미 있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단테」를 든 것은 마음속에 늘「단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테」가 「라틴」어를 쓴 것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었다.「단테」를 통하여 「라틴」 어와 그것으로 쓰여진 고전은「유럽」문화의 밑거름이 됐다. 그의『신곡』은 특히 고대「로마」와 「유럽」문화 그리고 고대와 기독교의 사상적 다리를 놓았다. 그의「가톨릭」신앙은 단순한 인간의 문제를 넘어 역사 및 정치를 보는 준거로까지 승화되었다. 「단테」사상의 밑바닥에는 합리적 세계의 주축으로「라틴」문화와 기독교「유럽」의 개념이 깔려있다.
「괴테」에 대한 「드골」의 생각은 「나폴레옹」의 평가에 따르는 것 같다. 「나폴레옹」은 「괴테」를 그의 유일한 천구로 생각했다. 「괴테」의 「유럽」주의는 작품을 통해서 부단히 추구되었는데, 「이탈리아」및 지중해문화의 전통 그리고「프랑스」의 예술 및 문화와 「프랑스」혁명의 성취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특히「프랑스」는 「괴테」에 있어 문제 의식의 공급원이 되기도 했다.
독일인들이 그의 문화유산을 즐겨 상속받았지만 그는 항상 독일의 장래에 비판적이었다. 1813년께 독일의 군국주의와 「쇼비니즘」에 대해 우려하면서 그는 항상 민족주의에 앞서는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샤토브리앙」은 「드골」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으로 그가「샤토브리앙」을 들 때는 솔직한 심정인 것 같다.
좀 현대적이긴 하치만「샤트브러앙」의 『기독고의전재들』이란 책은 『신곡』에서처럼 신의와 국가적 양심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다.
고전적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낭만주의 운동의 대표자가 되었다. 「드골」처럼, 그는 근엄하면서도 화려함을 갖춘 복합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천재적 작가인 동시에 군인으로 여행가로 대사로 장관으로 「프랑스」의 중요한 일에 관여했다.
「드골」은 「샤토브리앙」이「자코방·프랑스」에 쫓겨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개선 장군처럼 귀국하여 일약 절대적 명예를 누리는 문인이 되었던 사실을 과대 평가하고 있다. 두 사람은 다같이 고집불통의 공상가였다.
그런데 「드골」이 든 이 3거인은 영국의 평론가「매듀·아널드」가 최고의 지성서로 철학적 진리와 역사적 통찰력을 보여주었다고 한『신곡』『파우스트』『기독교의 천재들』의 바로 그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그의 평가를 가볍게만 볼 수 없는 무게가 있다고 「스타이너」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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