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 20년 월남동포 실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월남동포·납북자 가족 등 실향민들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최저 21년, 최고 26년이란 긴 세월을 고향을 등지고 부모처자의 소식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분단의 설움을 몸소 경험하는 이들의 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북5도청에 의해 대략 5백14만2천8백명으로 집계되고있다.
이들은 모두가 자유를 찾아 남하한 사람들인데 약90%가 고향인 이북 땅에 가족의 일부를 남겨 놓았으며 나머지 10%도 친척의 누군가를 남기고 있으며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5백14만명중 해방직후인 45년에서 46년까지 북괴의 압제에 못 이겨 단신 또는 일가권솔이 남하한 사람의 수는 대략 5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나머지 4백50만명은 6·25후의 1·4후퇴 당시 남하했다.
실향민들은 대부분이 1·4후퇴 당시 남하한 탓으로 그 정착지가 전국적이긴 하지만 함경남·북도 사람은 부산·강릉·속초 등 동해안에 많고 평남·북, 황해도사람은 기호지방에 많은 정착양상을 보이고 있다. 함경도사람은 1·4후퇴 때 원산에서 배편을 이용, 부산으로 많이 왔고 진남포쪽은 인천·군산으로 많이 내려온 것인데 이 추세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월남해온 이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6·25전에 남하한 사람들은 미군당국의 구호나 서북청년단 등 단체의 보호를 많이 받았으나 1·4후퇴 당시에 넘어온 사람들은 날품팔이 또는 넝마장수 등 자기능력으로 자립해야 했으며 전쟁을 치러야 했던 슬픔을 겪었지만 20년이 흘러간 지금은 생활기반이 닦였고 이제는 학계, 재계 등 사회진출에 성공한 사람이 많다.
월남동포들은 한때 사학진출에서 많은 제약을 받아왔다.
취직을 하는 경우 자격증·학력증명 등을 할 수 없어서 62년까지는 이북5도청에서 동향인 3명의 연대보증으로 학력을 인정해 주는 등 편법으로 보호되어왔다.
실향민들의 편의와 행정을 말고 있는 곳이 이북5도청. 이북5도청은 1949년에 발족, 월남동포를 돌보았으나 친목단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1·4후퇴 등으로 월남동포가 급격히 늘었으나 이북5도청은 그대로 유지해 오다가 62년1월20일에 비로소 정부의 법률 제987호가 마련됨으로써 비로소 기구·인원·임무 등이 규정되어 수복되지 아니한 이북5도의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를 갖게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7월30일 현재5도 지사 밑에 명예군수 82명, 명예시장 13명, 명예 읍·면장 7백55명을 발령, 통일에 대비하고있다.
그러나 실향민들은 호적정비계획에 따라 모두 가호적을 취득, 본적을 원적으로 하여 고향을 잊어가고 있으며 출신 군별로 군민회를 조직하여 1년에 두번 봄·가을에 야유회로서 고향친지를 만나 회포를 풀고 있다. 고향을 떠난 지 20년 이상 지나는 동안 대를 이을 10대 20대는 부모의 고향을 헤아릴 길 없어 실향민들의 슬픔은 차차 40대 이상 층에 국한되는 경향에 있다.
5백만 실향민들은 고향을 그리다 못해 70년11월 재북조상경모대회(제주 조영식)를 열어 고향하늘에 절하고 부모·친척들의 평안을 기구했었다. 이중에는 「브라질」 외국에 이민간 이도 있어 제2의 실향민이 된 사람도 없지 않다.
실향민들은 지금 서울에 1백31만명, 부산 60만명 등 별표와 같이 흩어져 살고 있다. <김경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