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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몰라도 독도 홍보영상에서 어찌 이런 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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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악마는 디테일(detail)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공개석상에서 인용한 경구다(9월 25일 무역투자진흥회의). 법안 취지가 좋더라도 세세한 시행과정에서 기업에 부담을 줄 수 있으니 유념하라는 말이었다. 숲만 보지 말고 나무를 꼼꼼히 챙기라는 당부가 어디 법안에만 해당될까. 외교부가 인터넷에 올린 독도 홍보영상물이 일본 TV방송 드라마를 표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NHK가 2011년 방영한 대하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중에서 러일전쟁을 묘사한 10초 분량 화면을 배경에 끼워 넣었다 한다. NHK 측의 항의를 받고서야 영상물을 황급히 거둬들였다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문제의 10초 화면은 디테일로 치부하기엔 악마성(性)이 너무 강하다. 하필 한·일이 독도를 놓고 전 세계를 상대로 동영상 홍보전을 막 시작한 시점이다. 표절 파문이 우리 쪽 주장의 신뢰도에 흠집 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관료들도 그렇지만 그 많은 전문가들은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 저작권 후진국이라면 모르겠는데, 우리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로부터 벌써 5년 연속 지식재산권 감시 리스트에서 제외된 나라다. 문체부 소속 특별사법경찰이 눈 부릅뜨고 돌아다니며 저작권 침해 여부를 감시하는 사회다. 그런데 정부가 나서서 그것도 일본 것을 베낀다?

 그런 일을 아예 몰랐거나 그러려니 넘기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나는 어린 시절 ‘우주소년 아톰’이나 ‘철인 28호’ 같은 만화가 일본 것인 줄 모르고 보았다. ‘마징가 제트’도 비슷하다. ‘요괴인간’ ‘타이거 마스크’가 일본산(産) 스토리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을 처음부터 일본산으로 알고 본 것은 아마 ‘드래곤볼’ ‘슬램덩크’ ‘세일러문’ 등 1980년대 이후 작품일 것이다. 2003년 처음 방영된 ‘뽀롱뽀롱 뽀로로’가 세계 110여 개국에 수출되고, 한국 드라마·영화가 일본에서 환영받는 시대가 되면서 베끼기도 그친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기시감인가.

 시바 료타로의 원작소설을 드라마화한 ‘언덕 위의 구름’은 러일전쟁 당시 세계최강 코사크 기병부대를 격파한 아키야마 요시후루와 러시아 발틱함대를 수장시킨 일본 연합함대 명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형제가 주인공이다. 드라마 초반에 형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가 언급된다. 일본 개화기 사상가 후쿠자와는 연설(speech)·토론(debate) 등 서양 용어를 자국어로 번역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영어 ‘copyright’를 ‘판권(版權)’으로 번역한 사람도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우리는 일본에서 ‘판권’을 들여왔고, 다시 ‘저작권’ 용어도 수입했다. 그래서 이골이라도 났다는 말일까. 생각할수록 답답하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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