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억류 45일(하)|제 55동성호 선원 장일남씨 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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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억류되고 있는 동안 작업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비가와도 폭풍이 불어도 일은 쉬지 않았으며 경비병 자신도 쉴 수 없는 듯 했다.
잠은 밤10시부터 허가되었다. 아침 7시까지 9시간 동안 잘 수 있었지만 워낙 일이 고되어 피로가 겹치곤 했다.
밤10시부터 취침시간이라 하지만 누구도 쉽게 잠들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뉴스를 들을 수도 없었고 그저 내일은 또 무슨 일을 시키나 하는 걱정과 고향생각으로 안타깝기만 했다.
소련군인들은 작업하는 동안에도 가끔 한 사람씩 불러다가 조사를 하곤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는 것에서 시작하여 주민등록증은 무엇 하는 것이냐 하는 것 등을 물었다.
나에게는 신분증을 보고 해병예비역은 뭐냐고 물었고, 군대는 몇 살에 가느냐, 어린애를 낳으면 어디에 신고하느냐, 여관에 들 때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야 하느냐는 것 등을 물었다. 또 소련 함정을 보았을 때 왜 달아났느냐고, 몇 번 그물질을 했느냐고 세차게 물었으며 윽박질렀다.
작업이나 이 같은 윽박 지름도 고통스러웠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배고픈 것이었다.

<옷가지와 음식 바꿔>
우리일행의 식사는 5일분이나 1주일 분을 한꺼번에 주었는데 양이 아주 모자랐다. 15명의 1주일 분 양식이 쇠고기 통조림 5개, 소금에 절인 송어·청어 등 20∼30마리, 감자를 얇게 썰어 말린 것 25㎏, 보릿가루 3㎏, 식빵 7개 정도와 1인당 알사탕 같은 것 12알씩이었다.
이것으로는 양이 모자랄뿐더러 야채가 없어 영양부족에 걸려 할 수 없이 휴식시간마다 민들레 등 산 풀을 캐다가 부쳐먹기도 했다.
한번은 식량을 타러갔다가 담당자인 소련군이 볼펜에 눈독을 들이는 것 같아 주었더니 고맙다면서 생선을 몇 마리 더 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옷가지를 음식과 바꿔먹는 길을 텄는데 우리가 입었던 「도꾸리·샤쓰」가 아주 인기였다.

<우리「팬츠」도 인기>
파라무실 섬의 인구는 약3천명으로 들었는데 민도가 낮은 것 같았다. 거기 사람들은 이상스럽게도 팬츠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의 옷가지 중에서 팬츠조차도 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우리가 차고있던 시계는 그들에게는 아주 좋은 것으로 비치는 것 같았다.
이 섬에서는 남녀의 구별 없이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중량 차를 운전하는가하면 선박에서 밥짓는 일, 배에 「페인트」칠하는 것까지 하고 있었다.
일이 힘들어서 그런지 소련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경비원이 자는 집 주위·식당 등은 아주 불결했다. 군 식당에는 언제나 찌꺼기가 쌓여 있었다.
우리들은 비록 갇혀있는 몸이지만 환경을 깨끗이 하여 긍지를 살리고 있었다. 한번은 소련장교가 와서 우리 식당을 보고 감탄하고는 자기들 식당을 좀 치워달라고 하여 청소를 하고 정돈해 주었더니 고맙다고 하는 것이었다.

<석방하던 날도 작업>
억류되어 있는 동안 우리들은 아무 것도 「뉴스」라고는 듣지 못했다.
석방되는 14일에도 작업장에 끌려나갔다. 오전에는 보통 때 같이 일했고 점심을 먹고 다시 집 짓는 일을 하고있는데 소련군 장교와 통역이 나타나 모두 막사로 돌아가 짐을 챙기라고 했다.
우리들은 또 한번 짐 검사를 하는가 싶어서 이번에는 소지품 중에서 무엇을 뺏길 것인가 하고 모두 불안해했다.
그런데 짐을 조사한 장교는 『내일 당신들을 태우려고. 일본배가 온다. 당신들은 고국에 돌아간다』고 말해 비로소 우리는 풀려 나오는 것을 알았다.

<선장 두고 온 슬픔>
이날 밤은 모두 잠을 자지 못했다. 선장 문씨가 『나는 「사할린으로 가서 재판을 받게될 모양이다』고 말하면서 14일 하오에 경비병과 같이 막사를 떠나갔다.
우리는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15일 새벽3시에 일어나 막사의 안팎을 청소하여 깨끗이 해놓았다. 아침 6시쯤 504란 번호가 쓰인 소련 함정에 올랐다. 욕을 치른 땅에 선장을 남기고 오는 슬픔에 누구도 기쁜 줄을 몰랐다.

<저기 배가 온다>
이 배는 잠시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출항했는데 11시쯤 『저기 일본배가 보인다』는 신호와 함께 배가 멎고 보트로 일본 배에 인계되었다. 일본 배에 탄 뒤 비로소, 석방 경위를 알았다. <끝> 【장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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