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의 보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18세의 한 소년이 특수절도의 누명을 쓰고 7개월 동안 옥살이하다 최근에 풀려 나왔다. 이 소년은 『무엇보다 내 죄가 없음을 밝혀준 재판장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한다.
이 사건은 누구에게나 법의 고마움을 새삼스레 일깨워 준 「에피소드」였다. 그러나 7개월 동안 받았을 온갖 수모와 고통의 보상은 어디다 호소할 수 있겠는지? 마중 나온 어머니를 안고 흘린 눈물은 또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소년처럼 상하기 쉬운 때도 없다. 그는 과연 철창 속에서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잃었겠는지. 어쩌면 무엇으로도 보장받을 수 없는 귀중한 7개월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만일에 빈민굴을 범죄의 고등학교라 비유한다면 철창은 대학격일 것이다. 이 속에 들어가면 어떤 초범자라도 범죄의 온갖 상식과 「트릭」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선악에 대한 균형감마저 잃게 된다.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네보다 월등하게 형무소시설이 좋은 미국의 연방감옥소장 「제임즈·베네트」의 말이다.
7개월 동안의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보상제도는 우리 나라에도 있기는 하다. 용케 풀려나 오면 누명도 씻을 수는 있다. 그러나 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배워서는 안 될 것을 배운 소년의 멍든 가슴을 무엇으로 달래어 줄 수 있겠는지. 또 그런 책임은 누가 져야 할것인지.
여러 해 전에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다 12년 만에야 무죄로 석방되어 나온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받은 보상금은 20만원이었다. 희망과 꿈으로 가득 찬 청춘의 한해 값이 1만6천 원 꼴이었던 셈이다.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한 취조관들에 대해 문책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밖에도 아무 데도 호소할 길 없는 범죄에 의한 피해자들은 허다하다. 가령 치한에게 폭행 당한 부녀자, 불량배에게 뭇매 맞아 병신이 된 사람, 강도에게 찔린 사람….
물론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잘돼 있다는 영국에서도 이런 범죄의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제도가 생긴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그들의 처지를 부러워하고만 있을 일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위정자들이 눈감아온 것,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들춰내는 것이 밝고 올바른 정치의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살기 좋은 나라를 꾸민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