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 무죄, 법리·팩트보다 감성 평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지난 23일 밤 11시30분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 시사인 기자 주진우(40)씨가 최후진술을 위해 일어서자 졸음을 참으려고 애쓰던 배심원 9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가 지난해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지만씨가 5촌 조카 살인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보도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등)로 기소된 재판에서다. 22일부터 진행된 국민참여재판 내내 변호인들에게 ‘주연’을 맡기고 뒤쪽 피고인석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그였다.

주씨는 “사이비종교 취재할 때는 암매장을 당할 뻔했고 국정원 취재할 때는 30명에게 둘러싸여 맞기도 했지만 무서워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 사건은 정말 무서웠고 협박도 숱하게 받았지만 그래도 해야 된다는 생각에 취재했다”고 밝혔다. 주씨가 재판의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등장하면서 팽팽하던 균형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2시간여 뒤인 24일 새벽 1시40분.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 김환수 부장판사는 “배심원 평결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주씨와 그와 함께 기소된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 의 공동진행자 김어준(45)씨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배심원 평결에서 시사인 게재 기사에 대해 배심원 9명 중 6명이 무죄를 평결했다. ‘나꼼수’ 방송에 대해서는 5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에 대해서는 8명이 무죄를 택했다. 재판부는 “배심원들이 주씨 기사의 의혹 제기 근거로 제시된 사실들을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취지로 다수가 무죄 의견을 냈고 재판부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배심원 평결은 재판부가 판단할 때 ‘권고적 효력’만 있지만 재판부가 배심원 평결대로 판결한 것이다. 검찰은 앞서 “해당 기사가 제시한 근거들이 모두 허위라서 악의적 보도”라고 기소했었다.

 이번 판결을 두고 법리·팩트보다 배심원의 ‘감성적’ 판단에 재판부가 휘둘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국민참여재판의 고질적 문제점으로 지적돼 왔다. 김현 전 서울변회 회장은 “기사의 전체적 취지가 박지만씨를 살인의 배후로 몰고 간 것으로 이해된다”며 “그럼에도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결론에는 의문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방청석에 주씨의 지지자들이 나와 있고 검찰의 구형에 야유를 보내는 등 법정 분위기도 상당히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며 “법관들이 판단했다면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찰 관계자는 “대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해 보도했다”며 “선거에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가 명백한데도 무죄가 선고된 것은 부당한 만큼 즉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2008년 처음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은 초기부터 감성재판 논란에 휩싸였다. 전문적으로 훈련된 법관이 아닌 배심원들을 상대로 피고인 측 변호인들이 감성적으로 호소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면서였다.

 2008년 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사상 첫 국민참여재판에서는 강도 혐의로 법정에 선 피고인의 미혼모 동생이 아이를 업고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 7월 인천지법에서는 남성강간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배심원들이 무죄를 평결하자 재판부가 이례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고 판결문에 기재하기도 했다. 정신장애가 있는 피해자가 제대로 증언을 못하자 배심원들이 무죄로 평결한 것이다.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파기돼 징역 6년이 선고됐다. 법무법인 세종의 홍탁균 변호사는 “일반인들의 상식을 반영한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정치적 사건이나 민감한 사건에서 국민참여재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민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