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가비 환상|박화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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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어쩌다가 어떤 사나운 파도에 밀려
외로운 모래톱에 쫓겨 나와서
소금 바람 뙤약볕에 패주는 끊기고
살은 사그라져 석회질의 빈 깝질만 남은
조가비 하나.
등에 아로새겨진 곱고 푸른 무늬는
가버린 좋은 옛 시절의 하염없는
추억일 뿐.
물새도 날아 오잖는 소외된 곳에서
속절없는 꿈을 위해 세월 허비 적이다가
다시 모진 태풍이 몰아치면
출렁이는 저 바다 깊숙한 속에
묻힐 것을….
사랑이며 미움, 모두 허사인,
능욕의 세정
그 쓸쓸함으로 하여, 아
차라리 나는 한 개
조가비가
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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