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기숙청년회(8)>청년이란 용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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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기회에「청년」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고 싶다. 청년이라는 용어는 지금은 누구나 다 알고 예사롭게 쓰는 말이다. 하나 황성기숙청년회가 청년회 간판을 처음 내걸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말이었다. 왜냐하면 과거 한국사회에는 소년은 있었으나 청년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소년으로 있다가 단박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가령,
소년은 역노하고
학난성하니
일촌의 광음인들
불가경
이라고 하는 옛날 노래라든가, 나라가 망할때 애국가 또는 소년남자가라는 것이 있었는데
무쇠 골격 돌근육
소년 남자야
애국의 정신을
분발하여라
다다랐네
다다랐네
우리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다랐네
라는 노래라든가, 현채씨가 쓴 유년필가라고 하는 책에는
독립하세 독립하세
우리나라 독립하세
우리청춘 소년들아
우리나라 독립하세…
라는 노래라든가를 보면 청년이라는 말은 없고, 다만 소년또는 소년남자, 육춘소년이 있었을 뿐이다. 물론 권학가라고 해서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벽상의 괘종을
들어 들어 보시오
한소리 두소리
가고 못오니
인생은 백년가기
주마같도다
하는 노래가 있기는 하지만, 이 노래는 1910년 직전에 나타난 노래였으며 지금 상동교회가 있는 자리에 전덕기목사가 세운 청년학원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1904년의 일이었으며 도산 안창호씨가 세운 청년학우회 역시 1909년의 일이었으며 육당 최남선씨가 최초의 월간지를 낼적에도『청년』이 아니라 『소년』을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YMCA는 1901년부터 조직되어 가지고 1903년에는 청년회라는 간판을 버젓이 내걸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YMCA는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청년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그것을 쓰기 시작하여 발전시킨 유일한 단체이었다.
소년과 노인만 있고 청년이 없었던 무기력한 한국사회에 청년을 발견하고 키운 단체가 누구냐 할때에 바로 그것이 황성기독교청년회라고 해서 틀림없다.
어쨌든 청년이란 용어가 처음 나타날때는 아주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저마다 이와같은 명칭을 쓰고 싶어했던 것이다.
교회기관이 이와같은 간판을 쓰는 것쯤은 참을 수 있었는데 엉뚱한 일반회사 단체가 기독교청년회란 이름을 퍽 달고 있는데는 정말 놀랐다. 그래서 YMCA 당국은 다음과 같은 고시문을 전국에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현금 대한 각처에서 기독교청년회 명칭을 자칭하고 그 회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낭결하고… 외지사건에 간섭이 유하다하니 성심괴아라… 대범 청년회를 논할진대 본회의 명칭으로 회를 조직함이 불가한 것은 본회에 정당한 사사위원과 총무가 유하여… 외지각처에는 본회에서 조직함도 무하고‥ 본회명칭을 창차하여 회를 조직함이 무사게 권고하시기를 간망 만실하오며, 본회의 영문과 한문의 명칭을 대미합중국공사와 대한 국내부의 인함을 득하고 대한국내부로서 각도 각군 관찰군수에게 훈령하여 본회는 단 경성내에만 설립되고… 기 외 타 청년회에 창칭하는 폐를 무케하며 본회의 관할된 회가 무함을 동지케 할거니… 광무9년11월 일 황성기독교청년회 위원 백』
이상 고시문에서 본 바와 같이 청년회란 간판을 일반 사회단체가 다투어 쓰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만큼 청년이란 용어가 매력적이었고, 청년이란 인생을 새로 발견한 한국인의 기쁨이 너무나 컸던 모양이다. 『가하면 예 하시고, 행하면 아니오 하시오』라는 회진항법이라든지, 회장 뽑고 서기 뽑고 회하는 것이라든지, 가변 불변으로 갈라져 토론회를 하는 것이 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이다.
또한 YMCA는 5개국 국민으로 조직된 국제기관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전에도 말한 바와같이 「언더우드」·「아펜셀러」·「게일」·「헐버트」같은 선교사는 물론이고, 그당시 인천세관장이며, 구 한국도지부 즉 재무부의 고문이었던 영국인「브라운」씨라든가, 주한미국공사이던「알렌」씨라든가, 그밖에 일·영·중·독·소 공사관의 공사 또는 관계된 외국 인사들이 많이 가담했기 때문에 더욱 이채를 띠었던 것이다. 한국 교회에 이러한 각국 인사들이 가담하여 조직된 국제 기관으로서도 YMCA가 사상 최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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