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비아냥, 시진핑은 압박 … 미국 체면 말이 아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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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의 연방정부 셧다운(일시 폐쇄) 사태가 길어지면서 중국·일본·유럽연합(EU) 등은 국제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국제사회의 문제아가 되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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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국채 최대 보유국인 중국(지난 7월 기준 1조2800억 달러·약 1370조원)은 보유자산의 가치가 하락할 것을 우려해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8일 보도했다. 주광야오(朱光耀) 중국 재정부 부부장(차관)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부채한도 마감 시한이 다가오고 있다”며 “중국은 미 정치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미국이 중국의 투자에 대해 안심시켜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2011년 미 정치권의 대립으로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한 사례를 들며 “미국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중국 정부가 미국의 셧다운과 부채 협상 지연에 대해 공식 논평을 내놓은 건 처음이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의 경제 전문가들은 지나친 달러화 자산 보유에서 탈피해 투자 대상을 다각화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일본도 미국 사태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은 8일 내각 회의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셧다운 여파가 이미 외환시장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서 “상황이 앞으로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EU는 미국이 셧다운에 이어 부채한도 증액마저 실패할 경우 미국과 교역 규모가 큰 유럽이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특히 셧다운 사태로 미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면서 미·EU 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당분간 무기 연기된 상태다.

이렇다 보니 인도네시아의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그동안 미국 대통령은 APEC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아 왔다. 하지만 올해 국내 정치에 발목이 잡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불참하는 바람에 미국은 잔뜩 체면을 구겼다. 기념 촬영에서도 주최국인 인도네시아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이 앞줄 정중앙에 섰고, 그 좌우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자리했다. 오바마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앞줄 맨 왼쪽으로 밀렸다. ‘정상’이 아닌 참석자였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이 해왔던 첫 기조연설도 APEC 정상회의에 처음 참석한 시진핑 주석의 차지가 됐다. 시 주석은 “전 세계 경제가 불안하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아·태 지역이 거시경제정책에서 세계경제 성장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중국은 아·태 지역의 발전적 융합을 위한 메커니즘을 준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앙숙인 푸틴 대통령은 연설에서 “미국 대통령이 국내 사정에 바빠 불참했다.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나라도 마찬가지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며 걱정 반 비아냥 반의 발언을 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케리 장관은 어색한 상황을 조크로 넘겼다. 그는 “미국의 정부 폐쇄는 그저 정치 과정의 한순간에 불과하다”며 “미국은 곧바로 이를 넘어설 것이며 전보다 더 강해진 모습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당시 미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패했던 케리 장관은 “2004년에 나는 대통령을 대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선 건 아니다”라며 웃었다. 청중은 그런 그에게 위로의 박수를 보냈다.

 당초 오바마 대통령은 올해 APEC 정상회의에서 미국·일본·캐나다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체결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외교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빠진 틈새를 이용해 시 주석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국은 TPP에 맞서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16개국이 참여하는 자유무역협정을 추진 중이다. 시 주석은 10일부터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도 협정 체결에 속도를 낼 계획이라고 중국 언론들은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오바마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에 불참함에 따라 미국의 이익이 크게 손상됐다고 보도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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