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의 세대교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명월관에 드나드는 단골손님들의 연령층이 차차 젊어지기 시작했다. 친일 재상이나 풍전등화같은 나라형편에 술집을 찾던 고관들의 발길은 어느덧 뜸해지고 망국대부의 자손들이 제2의 손님으로 등장했다.
기생은 옛기생 그대로 있었으나 손님은 엊그제까지 드나들던 대감들의 후손들이라 이들을 맞는 기생들의 흉중에도 오가는 감회가 새롭고 새삼 세윌이 변해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게 되는 듯 싶었다.
망국대부의 자손들이 새파랗게 젊은 나이로 어떻게 되어 기방과 요릿집을 먼저 찾게 되었는가 하는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정도로 누구나 짐작되는 일일것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제도는 선조가 높은 벼슬을 하면 자손들은 글공부나 열심히 하여 어려서 등과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벼슬길에 나서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었고, 이것은 또한 양반들이 갖는 일종의 출세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만년을 의적의 끊임없는 침략속에서도 이 나라를 지켜왔던 우리나라가 경술합방(1910년)으로 일본에 송두리째 빼앗겼으니 온 겨레가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나라가 없어졌으니 고관들은 관직이 없어졌다고 그 후손들에겐 벼슬에 오를 길이 막혔다. 글공부해도 소용없게된 세태였다 할까. 눈먼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나라가 없어지자 제일 먼저 망국의 슬픔을 피부로 느껴야 하는 것은 바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위정자들의 자제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망국대부의 자손들은 홧김에 술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겨레의 슬픔이 이 같이 깊은 때 젊은이들이 요릿집에서 기생을 끼고 하고한날을 보내야했으니 그들의 마음인들 오죽 답답하겠느냐는 생각에 뜻있는 기생들은 이들 젊은 손님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요릿집을 드나들게되자 시골에서 몇천석씩하는 부자의 자제들도 요릿집을 찾아들게 되어 자연히 늙은이들은 발을 끊고 명월관 손님은 젊어지게 되었다.
이때 찾아온 손님중에는 민범식 이덕구 서호식 박재호 윤모등이 기억에 남는다.
민범식씨는 목숨을 끊어 2천만 동포에게 애끊는 애국심을 호소한 충정공 민영환씨의 맏아드님 되시는 분이었다.
이덕구씨는 궁내부대신을 지낸 이경직씨의 손자였다.
일본 불한당들이 아소정에 은거하고 있던 대원군을 깨워 궁궐을 습격하여 민중전 마마를 시해할때 이경직씨는 궁내부대신이었다. 그는 쳐들어오는 일인들을 맞아 싸우다 그 자리에서 순사했었다.
서호식씨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개화파 서재필씨의 조카되는 분이었고 박재호씨는 마포의 유명한 갑부의 자제였으며 윤모씨는 충청도 부잣집 도령이었다.
하루는 민범식씨가 명월관에서 술로 망국한을 달래고 있다가 일본인 순사들에 의해 까닭없이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민충정공의 부인이시며 민범식씨의 어머님 되시는 정경부인께서는 이 소식을 듣고 곧 종로경찰서장실을 찾아가시어 『서장 들어보시오. 나라가 망하고 벼슬자리는 막혔으니 망국대부의 자손들이 할일이 무엇이 있겠소. 치미는 울화를 술로 달래는 젊은이들을 막는다면 내 아들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서장을 닦아 세웠다는 것이다. 이내 서장은 민씨를 석방했고, 정경부인의 이 말은 그때 사정을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무렵 망국대부의 자제와 부잣집자제들 뿐만아니라 돈없는 일반집 자제들도 이들과 함께 어울려 요릿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우리들은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을 골라『11명 건달』이라고 불렀다.
돈없는 사람과 돈있는 사람이 함께 왔을때 돈쓰는 사람을 대장이라 불렀고 따라다니는 사람은 병정이라고 했다.
명월관등 요릿집마다 이들이 끼리끼리 방을 메웠으니 아리따운 기생을 두고 서로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요즘은 술집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사리를 따지기전에 주먹이 오가고 맥주병이 나는 것이 예사 순서지만 그때는 대장이 서로 앞뒤를 설명하는 일대 논전이 벌어지는 것이 순서였다.
대부분의 싸움은 기생때문에 벌어지는 것으로 싸움이 일면 말미가된 기생은 벌벌떨며 한쪽구석에 쪼그리고 않았지만 관계없는 기생들은 재치와 수완으로 양쪽을 달래 싸움하는 축들의 아버지때부터 모셔온 관록을 십분 발휘하기도 했다.
어떻든 싸움이 끝나면 진쪽은 사과하고 이긴 쪽은 웃어 넘겼다. 뒤이어 화해술이 오고 갔다.
비록 술에 취했을망정 젊은 혈기에도 이만큼 자제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어려운 때를 만나 퍽이나 다행스럽고 한가닥 미더운 모습으로 기생들의 눈에 비쳤다.<계속>계속>손님의>
(53) 제4화 명월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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