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자연은 창조주의 성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2호 27면

나는 지금 교회에서 안식년을 허락받아 미국 애틀랜타의 컬럼비아신학교 도서관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학기가 막 시작돼서인지 교정을 청소하는 손길부터 학교 직원들, 교실을 찾아가는 학생들까지 캠퍼스가 온통 분주하다. 무엇보다 분주하게 다가오는 것은 교정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의 소리다. 새들과 더불어 온갖 소리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 듯하다. 이곳은 나무가 울창해 캠퍼스도 교정이라기보다는 마치 원시림 속의 움막 같은 느낌을 준다. 처음 유학 갔을 때가 1984년 가을이었다.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긴장 없이 책을 대한다는 점과 당시에는 없던 배낭패션으로 도서관을 드나든다는 점이다.

학위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지도교수가 “한국에 돌아가면 미국의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겠느냐”고 물었는데, 그때 나는 스스럼없이 “자연을 그리워할 것 같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당시만 해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오염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미국에 도착하면서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사람의 손길이 닿으면 자연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자연에 대해 무척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미국의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우리나라의 자연도 그 못지않다. 다만 자연을 바라보되 단순히 인간이 더 잘살기 위해 돌보는 차원을 넘어 보다 깊은 생각을 갖기를 바란다.

가을마다 다가오는 자연의 풍성함과 찬란함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어졌다’는 사실은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나 삶의 자세를 크게 다르게 한다. 자연은 우리가 만든 것도, 우리 힘으로 이룬 것도, 심지어 우리가 원한 것도 아니다. 자연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주어진 자연과 더불어 시작되고 자연의 도움으로 모든 것을 이뤄 나간다. 자연의 주어짐이 없었다면 과연 인간의 생존조차 가능했을까?

미국 오하이오의 한 농업연구소에서 흥미로운 연구를 했다고 한다. 농부가 1년간 최선을 다해 일했다고 할 때 농작물 수확에 농부가 기여한 몫이 얼마나 될까. 1에이커의 땅에서 100부셸의 옥수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농부의 수고 외에 6800파운드의 산소, 5200파운드의 탄소, 160파운드의 질소, 125파운드의 칼륨, 그 밖에도 수많은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비와 햇빛과 물이 적절한 때 주어져야 한다. 그러면 농부의 노력은? 5%라고 한다. 나머지 95%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내 몫은 5%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가슴에 다가올 때 우리의 영적 감수성은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은 조물주를 향하게 된다. 자연은 창조주의 존재와 돌보심을 기억하게 하는 거룩한 성전이며 인간의 삶을 존귀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복된 은총이다.

인간의 마땅한 응답은 은총에 대한 감사와 함께 창조주의 뜻에 따라 성전을 돌보기 원하는 청지기의 충성된 헌신이다. 그러기에 자연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것은 단지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보기에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연의 주인 되시는 창조주에 대한 예배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마치 내 것인 양 정복하고 이용하려는 거짓과 탐욕의 마음은 어느덧 사라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는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박원호 장신대 교수와 미국 디트로이트 한인 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 등을 지냈다. 현재 ‘건물 없는 교회’로 유명한 주님의 교회 담임목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