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감춰진 증세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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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8000만원대의 연봉을 받는 회사원 A씨는 연말정산 때 각종 소득공제를 받아 해마다 100만~200만원가량의 세금을 돌려받는다. 각종 소득공제를 제외한 과세표준 소득은 2008년 4500만원에서 지난해 5298만원까지 상승했다. 증가액수만 보면 그의 소득은 5년간 18%나 뛰면서 798만원이 늘어났다. 하지만 전업주부와 함께 자녀 두 명을 부양하는 그의 살림살이에는 큰 변화가 없다. 지난 5년간 연평균 3.3%로 나타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 소득이 5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다.

연봉 8000만원 5년간 세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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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실질 세금은 꾸준히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가 낸 소득세가 2008년 567만원에서 지난해 750만원으로 불어나면서다. 연봉 증가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소득 대비 세금부담률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의 소득세부담률(과세표준 대비)이 같은 기간 12.6%에서 14.1%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가상승분을 빼고 나면 소득이 실질적으로는 제자리걸음하고 있지만, 상당수 근로소득자들은 이같이 명목상 금액이 늘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꾸준히 세금을 더 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다음달 발표할 ‘계층별 소득세 부담률과 감추어진 증세’ 논문에서다. 김 교수는 “현행 누진과세 체계에서는 물가상승으로 인해 명목 소득만 늘어나도 납세자의 소득이 보다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소득구간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해마다 실질적인 증세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소득 대비 세금 부담률 계속 올라

 이 같은 현상은 ‘과세 소득구간의 상향이동(브래킷 크리프·bracket creep)’에 의한 증세 효과로 불린다. 김 교수는 “정부는 1980년 이후 세율을 지속적으로 인하해 왔지만 소득세 통계를 보면, 실제 소득세 부담률은 지속적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세액공제 전환에 따른 증세를 거위의 깃털을 고통 없이 살짝 뽑는 것으로 비유했지만, 사실은 거위의 살점을 떼가고 있었는데도 납세자도 국회도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정부가 최근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해 실질적으로 증세를 도모하려 하자 감세에 길들여진 납세자들이 적극적 조세저항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물가상승은 물론 실질소득의 증가도 빨랐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증세가 상당한 규모에 달했고, 그 덕분에 정부와 정치권은 30여 년 동안 세율을 선심 쓰듯 낮추고, 소득공제를 남발해 왔다는 게 김 교수의 지적이다.

김낙년 교수 “매년 증세해온 셈”

 또 다른 문제는 이 ‘감추어진 증세’로 인한 부담률의 상승이 계층별로 다르다는 점이다. 김 교수의 추계에 따르면, 1996~2011년 사이에 최상층 0.01%를 제외한 소득층의 부담률은 모두 상승했다. 상위 0.1~1% 그룹은 16.1%에서 20.8%로, 상위 1~5% 그룹은 11.5%에서 13.5%로, 상위 5~10% 그룹은 8.3%에서 9.7%로 높아졌다. 최상층 0.01%는 소득세 부담률이 34.9%에서 33.5%로 하락했다. 이미 최고 소득구간에 속해 있어서 소득이 더 늘어도 이동할 상위 과세 구간이 없기 때문이다. 최상층만 제외하면 대부분의 근로소득자들이 ‘감추어진 증세’의 대상이 됐다는 얘기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소득세가 ‘자연’ 증수(增收)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소득세가 증수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부담률이 높아진 결과이며, 더구나 그 부담률의 상승이 계층 간에 불공정하게 배분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득구간 물가연동제 도입을”

 김 교수는 이같이 왜곡된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소득구간의 물가연동제(indexation)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북유럽 국가 등 19개국은 물가연동제를 도입 중이다. 김 교수는 나아가 “납세자와 국회의 통제를 벗어난 감추어진 형태의 증세는 과세의 원칙을 위배했다는 점에서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정부와 정치권이 증세를 고려할 때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김동호 기자

◆브래킷 크리프

물가상승으로 인해 명목소득만 늘어나도 납세자의 소득이 보다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소득 구간으로 밀려 올라가 실질적인 증세가 일어나는 현상. 그 결과 세율의 인상 없이도 소득세부담률이 상승하게 된다. 납세자도 모르게 세금이 늘어나므로 ‘감추어진 증세(hidden tax hike)’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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