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제자는 필자>|<제2화>무성영화 시대(9)신일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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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돈에 팔린 결혼>
인기인들, 특히 여배우의 운명이 기구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꽃이 피면 지게 마련이듯이 여배우도 늙어지면 빛을 잃고 마는 것이다.
또 그 당시에는 영화계가 자리도 잡히지 않았고 영화라고 1년에 많아야 5∼6편이 제작되던 때였으니 영화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출연자나 연출자가 보수를 강요해 본적도 없었고 그저 영화사에서 제 끼 밥만 얻어먹고는 혼자 신바람이 나서 뛰어 다니던 때였다.
여배우도 마찬가지로 별다른 보수를 받지 못했다.「스타」로서「팬」들의 인기는 한 몸에 받았지만 그 인기만 가지고는 배가 부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배우들을 돈푼이나 있는 남자들이 그냥 내버려두질 않았다. 피는 꽃은 꺾고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든 있는 남자들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때쯤에는 출연료도 제대로 못 받고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술과 도박에만 빠져있던 오빠가 나를 어느 부호에게 시집보내려는 꿍꿍이속이 싹텄던 모양이었다.
나운규씨도『아리랑』이후 여려 면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모두『아리랑』의 수준을 능가하지 못했고「슬럼프」에 빠져있었다. 게다가 돈을 대겠다는 제작자가 없어 자금난으로 허덕이기까지 했다. 이즈음 나 선생에게 제작비를 부담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대개 나에게 은근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를 눈치챈 나 선생은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여배우를 미끼로 네놈들의 돈 문을 얻어 쓰고 싶지는 앉다』고 딱 잘라 거절해 버리기도 했다.
이때 나 선생은 조선일보에 연재 중이던 최독견씨의 소설『승방비곡』을 영화 하겠다고 나섰다. 나 선생이 맨주먹으로 이렇게 나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신문 서설은 요즘처럼 삽화를 넣지 않고 매회「스틸」사진을 찍어 삽화를 대신했었다 물론 촬영을 나 선생이 말았고 내가 여 주인공으로 등장했었다. 이「스틸」사진은 신문 독자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이 촬영 때 하루는 한강변의 어느 바위 위에서 연인이 투신 자살하는 것을 구출키 위해 「보트」를 타고 가는 장면을 찍게되었는데 채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내가 신은 구두 뒤축이 이끼 낀 바위에서 미끄러져 그대로 강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까만「세루」치마와 분홍색 겹저고리가 흠뻑 젖어 마치 풀에 빠진 새앙 쥐 같이 되고 말았다. 조금만 구출이 늦어졌어도 그대로 떠내러 갈 뻔했다.
한참「스틸」사진을 촬영하는 중에 나 선생은 그 사진을 들고 동분서주하며 자본주를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제작자들이 그를 불신하는 바람에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하고『승방비곡』은 기획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이『승방비곡』은 그후에 동양 영화사의 제1회 작품으로 영화화되었었다. 이 서구각색· 이구영 감독, 윤봉춘 이경선 김연실 함춘하씨 등이 출연했다.
영화 출연도 없고 해서 한동안 나는 무모하게 달을 보내게 됐다. 외출이래야 극장구경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무렵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승 일이 창 운 오빠에게 찾아와 자기 누이동생과 같이 나를 동경에 보내 무용 공부를 시키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왔다.
그러나 오빠는『생활도 궁하고「딴따라」란 어차피 상대가 별 수 없으니 마땅한데 시집이나 보내겠다』며 한마디에 거절해 버렸다.
이때 무대 배우이던 심 영의 소개로 영화제작에 뜻이 있는 자본주라며 호남부호의 아들인 양승환씨를 알게 되었다. 양승환씨를 나에게 소개할 때부터 오빠와 심 영은 나를 그에게 시집보내려고 밀약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감쪽같이 속고 있었지만 양승환씨는 그일 때문에 일부러 올라와 조선「호텔」에 묵으며 공세를 벌였고 오빠는 이미 그에게서 큰 기와집과 거액의 돈까지 받아 결혼날짜까지 받아 버렸던 것이다.
얼마 후 내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된 후였다. 아무리 앙 탈을 부리며 버텨보아야 오빠는『너의 상대를 생각해서야!』하며 오히려 큰 소리만 쳤다.
내가 결혼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해지자 맨 먼저 달려온 사람이 나운규씨였다. 그는『이럴 수가 있느냐』면서 방바닥을 치고 말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선생이 화가 잔뜩 나서 돌아간 뒤 곧 이어 김을한씨 등 당시의 각 신문기자들이 인력거를 타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입을 모아 멋모르고 결혼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양승환씨는 이미 본처와 자식이 있고 오빠가 돈을 받고 누이를 팔려는 것이라고 흥분해서 폭로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빠는『본처와 이혼했으니 그런 걱정은 말고 더 이상 남의 집일에 파고들지 말라』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날은 또 수십 명의「팬」들이 몰려와『신 일선이 나 오라』며 대문을 두드리고 아우성을 치기도 했다.
또한 나를 저주한다는「팬」들의 항의 편지가 수십 통씩 날아들었으니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식음을 전폐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우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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