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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완화 축소의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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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일러스트=강일구]
김종수
논설위원

과연 이게 약(藥)이 될까, 아니면 독(毒)이 될까.

 우리의 추석 연휴 기간 중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공개시장위원회(FOMC)가 내리게 될 양적완화(QE) 축소 결정 말이다. FOMC는 현지시간으로 17일부터 이틀간 정례회의를 열어 2008년부터 계속해온 양적완화 조치를 축소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지금으로선 소폭 축소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양적완화는 한마디로 극단적인 돈풀기다. 통상적인 통화완화정책은 기준금리를 내려 시중의 돈값을 싸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엔 이런 식의 통상적인 돈풀기만으로는 시중의 자금경색이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벤 버냉키 미연준 의장이 동원한 방식이 시중에 직접 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연준이 금융회사가 보유한 자산을 매입하고 그 대금으로 현금을 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중에 돈을 거의 강제로 주입하는 물량작전을 쓴 셈이다. 이런 무지막지한 돈풀기 정책을 점잖게 ‘양적완화’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오죽하면 버냉키 의장에게 ‘헬리콥터 벤’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양적완화 조치를 두고 헬리콥터에서 돈을 살포하는 것에 빗댄 것이다. 그 정도로 미국의 자금경색이 심각했고, 자칫하면 미국 경제의 기반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었다.  

한가위에 날아든 연준의 결정

그런데 이제 미국이 그 양적완화 조치를 거둬들이려 하는 것이다. 미국 경제가 최악의 위기국면을 넘기고 안정적인 회복기에 들어섰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버냉키 의장은 양적완화 축소의 전제조건으로 경기회복의 가시화와 실업률 축소를 꼽았다. 버냉키 의장은 이런 조건이 충족되면 양적완화를 단계적으로 줄여 나가겠다고 진작부터 공언해 왔다. 이번에 그 축소 시기가 무르익은 것이다. 양적완화의 축소를 예고한 것은 비상시에 도입한 비상한 통화정책을 경기가 회복된 후에도 계속 끌고 가다간 인플레이션의 역풍을 맞을 우려가 있다는 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양적완화 축소가 불러올 충격을 사전에 무마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는 나쁠 게 없다. 그만큼 미국 경제가 호전됐다는 뜻이고, 그에 따라 비상시에 도입한 대책을 정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야를 넓혀보면 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실 세계 양대 경제권인 미국과 유럽이 금융위기와 재정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시기에 세계경제를 지탱해온 마지막 보루가 미국의 양적완화 조치였다. 미국의 무제한 달러 살포는 미국 내의 자금경색만 푼 것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돈줄이 되어 빈사상태의 유럽국가들과 선진국 경기에 의존하는 신흥국 경제에 온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세계는 미국의 돈다발 세례에 익숙해졌고, 넘치는 유동성 속에 젖어 어느덧 안온함마저 느끼게 됐다. 그러던 차에 미국이 그 돈다발을 거둬들이겠다고 하니 갑자기 한기를 느끼고 화들짝 놀라게 된 것이다.

 양적완화 축소의 예고만으로도 체력이 약한 신흥국들은 벌써 충격을 받고 오한이 들었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치솟은 것이다. 우선 외환 건전성이 취약하고 금융 시스템이 부실한 나라부터 도마에 올랐다. 브라질·인도·인도네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희생양으로 지목되고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일단 그 첫 번째 충격파의 사정권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체력이 약해 보이는 다른 신흥국들과 차별화되면서 외국인 투자자금이 몰리면서 모처럼 주가가 상승세를 타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의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와 넉넉한 외환보유액, 낮은 단기외채 비중 등을 높이 산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외국인 투자자가 언제 변심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데다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앞으로도 외풍(外風)에 끄떡없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 경기회복 활용해야

 우선 번듯한 대외지표들과는 달리 대내적으로는 소비와 투자의 부진이 장기화하면서 저성장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저성장을 탈피할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찾지도 못했다. 여기다 과도한 가계부채를 해소하지 못한 채 재정적자에 따른 나랏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다른 신흥국들과 차별화된다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기초체력이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박근혜정부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겉으로는 양적완화 축소에도 잘 버티고 있다지만, 내심 그 이후까지 잘 버티고 나아가 이를 새로운 기회로 활용할 여력은 아직 없는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경제가 나아졌다거나 앞으로 크게 개선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가시적인 증표는 나온 게 없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는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론 국제적인 유동성 축소에 따른 금융경색의 진원지가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론 세계경제가 과잉유동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경기회복의 길로 나가는 조짐일 수 있다. 단기적으로 외국인 투자자금의 유입에 취해 안주한다면 독이 될 가능성이 크고, 이를 계기로 다른 신흥국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경쟁력을 갖춘다면 보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역시 선진국 경기회복을 저성장 탈출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결국 양적완화 축소가 풍성한 한가위 선물이 될지, 아니면 장래에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덫이 될지는 우리 하기에 달린 셈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