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무대에 적응, 긴장 풀려 예전 버릇 도진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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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호 19면

11일(현지시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한 류현진은 6이닝 동안 10피안타·1탈삼진·3실점했다. 이에 따라 평균자책점도 3.07로 조금 올랐다. [중앙포토]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한 류현진(26·LA다저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1회 징크스다. 그는 올 시즌 27번째 등판인 12일(한국시간) 애리조나전에서 시즌 6패째를 기록했다. 14승 도전에 나섰던 류현진은 6이닝 동안 안타 10개를 맞고 3실점하면서 무너졌다. 경기 시작과 함께 세 타자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1회에만 2점을 내준 게 화근이었다.

류현진의 1회 징크스, 왜?

 야구의 특성상 1회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득점이 난다. 발 빠르고 정확한 1번 타자부터 시작해 중심타자들을 줄줄이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류현진은 유독 1회에 실점이 많은 편이다. 1회 평균자책점이 4.67로 시즌 평균자책점(3.07)보다 50% 이상 높았다. 몸이 풀리기 시작한 2회부터 5회까지는 점점 평균자책점이 낮아졌다. 피홈런도 13개 중 절반 가까운 6개를 1회에 얻어맞았다. ‘1회 징크스’란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류현진은 한국에서도 1회 성적이 나빴을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류현진은 한화에서 뛰던 지난 시즌 1회에 평균자책점 5.33을 기록했다. 3점 이상 대량실점을 한 것도 세 번이나 됐다. 제구력이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는 볼넷과 폭투 비율도 1회가 가장 높았다. 메이저리그 진출 뒤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란 뜻이다. 사실 1회가 어려운 건 류현진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2000년 LA다저스에서 한국인 메이저리그 최다승인 18승을 거둔 박찬호(40·은퇴)도 유독 1회에는 평균자책점 4.99를 기록할 정도로 어려워했다. 투수들은 물론 지도자들도 “1회가 어렵다. 그중에서도 첫 타자 승부가 가장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투수 출신인 양상문 MBC SPORTS+ 해설위원은 ‘감각’을 이유로 들었다. 양 위원은 “선발투수는 5~6일에 한 번 등판한다. 그만큼 쉬고 마운드에 오르면 익숙하지 않다. 경기 전 불펜에서 20~30개 정도를 던지지만 마운드에서 던지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1회에는 뜻대로 던지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전문가인 송재우 JTBC 해설위원도 “류현진은 구위로 상대를 제압하기보다는 제구력으로 타자를 요리하는 스타일이다. 아무래도 1회에는 변화구 제구력이 잡히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유독 1회 투구내용이 나쁜 것 같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100%의 상태가 아닌 공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메이저리그의 힘 있는 타자들에게는 스트라이크존 가장자리를 활용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2일 애리조나전이 대표적인 예다. 이날 류현진이 1회에 허용한 안타 3개 중 2개는 변화구가 높게 들어가거나 가운데로 몰리면서 내준 것이었다.

 양상문 위원은 류현진의 훈련 스타일을 또 다른 이유로 지목했다. 일반적으로 투수들은 등판일과 등판일 사이에 한두 차례 불펜에서 연습투구를 한다. 구위와 제구력을 점검하고 좀 더 많이 던질 수 있도록 밸런스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류현진은 국내는 물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에도 불펜 피칭을 하지 않는다. 릭 허니컷 LA다저스 투수코치도 “류현진의 방식을 존중한다”며 불펜 투구 생략을 인정했다. 특별한 부상이 있거나 등판 간격이 떨어졌을 때만 30~40개 정도를 던졌다. 양상문 위원은 “불펜 피칭은 떨어진 투구 감각을 살리는 효과도 있다. 그런데 류현진은 불펜 투구를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경기 초반 투구 감각이 남들보다 더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짚었다.
 
한 방 맞아야 정신 차려 몸 풀리는 스타일
“애어른이죠, 애어른.” 송진우 한화 코치는 류현진에 대해 “신인 때부터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고 말한다. 위기에서 긴장하거나 압박받지 않고 자신의 투구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화 구단 내부에서 실시한 테스트에서도 류현진의 이런 성격이 드러난 적이 있다. 한화는 심리학을 전공한 이건영 박사에게 경기력 향상 코치직을 맡겨 선수들의 심리적인 부분을 관리하고 있다. 이 박사는 지난해 스프링캠프에서 설문지를 통해 선수들의 심리 상태를 점검했다. 류현진은 경기 때와 평상시의 차이가 가장 적은 ‘강심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건영 박사는 “그때도 1회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나눴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현진이는 1~2회에 좋지 않다가도 3회가 지나면 ‘몸이 풀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기 전 관절 가동범위를 늘리는 스트레칭이나 연습 투구를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몸이 풀려 있다. 엄밀히 말하면 ‘한 방’을 맞고 나면 정신적으로 깨어나면서 굳은 몸이 풀렸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체적인 워밍업처럼 심리적인 워밍업을 거쳐야 최고의 몸 상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에는 최적각성수준(Optimal Level of Arousal)이라는 용어가 있다. 사람마다 각자 최고의 각성 상태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이다. 이 박사는 “역도의 경우 한 번에 모든 힘을 폭발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성 수준을 미리 끌어올려야 한다. 경기 전 소리를 지르거나 코치가 뺨을 때리는 동작이 바로 그런 것이다. 반대로 사격이나 양궁은 호흡을 느리고 차분하게 한다. 그 종목에서 최고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박사는 “개인적인 성향도 최적각성수준에서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신인 선수들은 각성수준이 높다. 이 경우 낮춰주는 게 필요하다. 반대로 베테랑 선수들은 이를 끌어올려야 한다. 현진이의 경우 국내에선 각성수준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올 시즌 초반에는 메이저리그란 낯선 무대에 가면서 긴장하면서 각성수준이 높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점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긴장도가 차츰 낮아졌다. 그것이 최근의 1회 부진과도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라고 추측했다.
 
야구 지능 높아 스스로 돌파구 찾을 것
국내 야구인들은 류현진을 평가할 때 ‘야구 지능이 좋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유연한 투구 폼과 강한 어깨 등 육체적 능력 못지않게 상대 타자와 승부하는 요령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송재우 해설위원은 “류현진의 성공 비결 중 하나가 야구에 대한 센스다.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상대에 맞춰 기량을 발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시범경기를 통해 자신의 빠른 공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한 뒤 정교한 제구력으로 승부를 걸었다. 류현진의 똑똑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그런 류현진인 만큼 1회가 중요하다는 것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지난달 31일 샌디에이고전이 바로 해법의 실마리다. 류현진은 이날 1회부터 시속 94마일(151㎞)의 강속구를 뿌려 3자범퇴로 막았다. 1회를 잘 막은 류현진은 6과3분의1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시즌 13승째를 챙겼다. 류현진은 경기 뒤 “1회부터 매 투구를 강하게 던진다는 생각으로 던졌다. (1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정말 1회엔 점수를 주고 싶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양상문 해설위원은 “1회에 부진한 투수가 징크스를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평소보다 더 많이 불펜 피칭을 하거나 워밍업 시간을 늘리는 것이지만 늘 효과적인 건 아니다. 그보다는 부담을 떨쳐내고 자신의 공을 던지느냐가 중요하다. 직접 지도한 적은 없지만 내가 본 류현진은 능히 그것을 해낼 수 있는 투수”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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