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분수령 될 3자 회동 … 민주당, 즉답 않고 기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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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12일 오후 1시40분쯤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제4회 노무현 대통령 기념 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뉴스1]

박근혜 대통령의 12일 전격적인 3자 회담 제안은 여러 면에서 민주당에 새로운 고민을 던져줬다. 의제를 한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회로 찾아가 정국 현안을 논의하겠다는 점 ▶순방 직후 3자 회담 카드를 꺼냈다는 점 ▶5자 회담에서 3자 회담으로 방향을 튼 것 등이 예상 밖이라는 평가다.

 박근혜 대통령의 3자 회담 제안으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으로 시작된 대치 정국은 분기점을 맞이했다. 연말까지 민주당의 장외투쟁이 이뤄질지, 아니면 전격적인 해법이 마련돼 국회가 정상화될지가 3자 회담 결과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이날 3자 회담에 대해 “일단 입장을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물밑에선 3자 회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다. 민주당 고위 관계자는 “여론을 감안하면 3자 회담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민주당이 표명한 ‘유보’ 입장은 회담에 앞선 기세 싸움의 성격이 짙다. 이날 오후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민주당으로 연락을 취해 김한길 대표를 찾았지만 김 대표는 전화를 피해 대표 비서실장인 노웅래 의원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 논란거리는 ‘회담 의제’였다. 노 의원은 “회담에서 어떤 얘기를 나눌 것인가”를 물었고 김 실장은 “장소와 시간을 얘기하려고 한다. (회담 내용에선) 윗분에게서 지시받은 바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이에 노 실장은 “회담을 하려면 먼저 의제를 정하고 이어 시간·장소와 형식을 정하는 게 상식 아닌가”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김 실장은 앞서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와의 통화에서도 “나는 윗분의 말씀을 전할 뿐 (회담 의제와 같은) 다른 말은 할 수가 없다”고 했다고 김관영 민주당 대변인이 전했다. 민병두 전략홍보본부장도 이정현 홍보수석과 전화 통화에 나섰지만 “(어떤 논의를 할지는) 지시받은 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 때문에 민주당이 즉답을 하지 않은 것이지만 청와대가 회담을 제안하면서 의제를 한정하지 않고, 국정원 문제를 포함한 모든 논의를 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만큼 거부할 명분은 줄어들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국정원 문제와 관련해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8월26일 수석비서관회의)며 야당과 논의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혀왔다. 그런 만큼 “모든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한다”는 제안은 기존 입장과 달라진 부분이다.

 다만 회담에서 국정원 개혁과 관련한 논의가 얼마나 진전을 보일지는 미지수다. 청와대에선 야당이 요구하는 대통령의 사과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내부적으로 국정원 개혁에 대한 민주당의 요구도 수용하기 어렵다는 기류가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회담에 나섰다간 박 대통령의 ‘훈시’만을 듣고 들러리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가 민주당에서 나온다.

 핵심 당직자는 “국정원 개혁에 대한 합의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이 만나면 회담 후 오히려 민주당과 청와대 간의 대치 상태가 더 깊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엔 당내 강경파들이 선명한 ‘성과’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빈손 회담으로 끝나면 지도부가 질 부담이 만만치 않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당장 “제1야당 대표가 노숙투쟁까지 했는데도 얻은 성과가 이 정도에 불과하냐”는 식의 반발이 공개적으로 불거질 수 있다. 이날 밤 민주당과 청와대가 회담 의제 등을 놓고 물밑 줄다리기를 하다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13일 오전 접촉을 이어가기로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른 당직자는 “청와대가 의제를 조율할 진정성이 없다면 김 대표는 환갑날인 오는 17일에도 천막당사를 계속 지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추석 여론에 민주당의 ‘회담 거부’가 화제로 올라가는 것도 민주당엔 부담이다. 이런 점들이 즉답을 내놓지 않은 이유로 보인다.

 청와대는 이날 회담의 투명성을 크게 강조했다. 이정현 수석은 “대통령의 통치철학이자 신념은 모든 것을 투명하게 국민들에게 밝히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 비밀스럽게 진행됐던 영수회담에서 ‘정치적 딜’이 있었던 관행을 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양자회담은 투명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커 야당의 의도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며 “3자회동을 통해 회담 내용에 대한 각자 입장에 따른 곡해나 오해의 소지까지 줄이자는 의도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회담 장소를 국회로 정한 것은 입법부를 존중한다는 뜻을 부각하고 야당의 조속한 복귀를 압박하는 의미가 담겼다. 지금까지 대통령이 국회에서 국회의장단과 여야 원내대표에게 순방 결과를 보고한 전례는 없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됐음을 보여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순방 중에도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아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며 “순방 내내 고민을 한 뒤 대통령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강태화·이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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