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하는 아랍권|요르단 내란 따른 새로운 역관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실향의 설움을 씻기 위해 대 이스라엘 철저 항전을 고집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아랍·게릴라 세력과 『한 나라 안에 두개의 정부』현상이 빚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후세인 요르단 왕간의 알력은 요르단을 전면내전 상태로 만들었다. 후세인 왕이 아랍·게릴라들의 준동을 실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16일 군사정권의 수립을 선포하자 야세르·아라파트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아랍·게릴라 통합군이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요르단에 주둔중인 1만2천명의 이라크군이 아랍·게릴라에 합세함으로써 모처럼 서광을 비춰오던 중동평화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대 이스라엘 투쟁에서 이라크가 나세르·후세인의 온건노선을 거부하고 나선 것은 전쟁의 직접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지리적 조건이 크게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67년 6일 전쟁 때 개전 3일만에 휴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요르단의 입장과 요르단 시리아 등을 방패로 갖고있는 이라크의 입장이 이러한 전열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해석이다. 요르단 내의 아랍·게릴라 통합군 총병력은 약 3만2천명. 이들이 1만2천명의 이라크군과 합세하여 5만5천명의 정부군과 전면전을 벌인 것이다. 군사정권의 타도를 내세워 사실상 후세인 왕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과연 군사적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중동평화의 가장 본질적인 요인이 『유대인들의 생존권과 실향인들의 망향 집념을 조화』시키는데 있음이 밝혀진 셈이다.
아랍·게릴라들의 공급원인 난민은 현재 1백5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 중 약 3분의1인 50여만명이 요르단(인구 약 2백10만)에 집결해 있으므로 정권유지와 실지회복을 둘러싼 우선 순위의 다툼이 이 지역에서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번 사태에 대한 아랍국가와 이스라엘 및 중동평화의 사실상 주역인 미소 등의 태도는 극히 미묘하고 신중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화회담 수락직후 요르단강서안의 이스라엘 점령지역 문제 때문에 몹시 불쾌했던 나세르·후세인의 관계가 급격히 호전된 반면 강경파와 온건파간의 틈은 더욱 벌어졌다.
한편 이스라엘은 다같은 적이기는 하지만 적대행위의 농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내심 후세인 왕의 전면적 승리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영국 식민지하에서 훈련된 후세인 왕의 정부군이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해도 50여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있는 한 이스라엘의 불안이 완전히 씻겨질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아랍국가나 이스라엘보다 더욱 미묘한 입장에 빠진 것은 중동평화의 실질적 책임을 맡고있는 미소양국이다. 왜냐하면 중동평화의 열쇠가 2차대전 후 열강들이 『인위적으로 세워놓았던 각 정권의 비위 맞추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1백50만 난민의 잃어버린 대지』에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어떤 해결책이 발견되지 않는 한 36만명의 난민이 집결해있는 가자지구, 27만여명으로 추산되는 요르단강서안 등지에서 제2, 제3의 극한투쟁이 일어나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미소의 이러한 협조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중동이 새로운 차원의 열강분쟁지역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중공이 수세에 몰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아랍·게릴라 대표의 북평방문과 중공의 무기공급에, 게릴라 지도자이자 팔 해방기구 중앙위원장인 야세르·아라파트의 주은래 면담예정설 등은 2차대전후 모든 국제 분쟁이 미소의 대결로 정석화 했던 세계정세에 새로운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이번 요르단 사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있는 평화회담에 역작용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2백80만의 분쇄를 위해 범 아랍주의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던 『1억의 단합』에도 심각한 균열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 분열은 후세인 왕의 승패나 일부에서 기대하는 협상에 의한 상호양보에 관계없이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을 것이다. <홍사덕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