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취임식날 이 아침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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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무현 대통령 취임날이다. 대구지하철 참사만 없었더라도 좀 더 성대한 취임식으로 국민 모두가 축하했을텐데 아쉽다. 이 아침 盧대통령에게 도움이 될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2개월이 넘는 당선자로서의 활동을 통해 그의 면모는 어느 정도 드러났다. 그 드러난 조건 속에서 좋은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盧대통령은 며칠 전 한 세미나에서 "나를 좌파로 모는 건 오해 때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이념으로 현실을 보려는 경향

선거 때 자신이 이회창 후보를 수구우파로 공격했듯이 그쪽 진영은 자신을 급진좌파로 몰았던 탓이라고 해명했다. 좌.우파라는 낡은 이념의 대립이 이 나라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착잡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좌파의 멍에가 어쩌면 5년간 그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좌파는 나쁜 것인가. 아니다. 유럽에도, 미국에도 정책으로서의 좌.우 성향은 있게 마련이다. 그 지향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념 우선주의가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이념주의는 현실분석을 소홀하게 만든다. 좌나 우나 이념으로 현실을 분석하게 되면 현실의 복잡성은 단순한 이데올로기 속으로 묻혀 버린다.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는 우리 현실문제를 반공에 대입하여 모두 해결하려 했다. 노동운동도 반공으로, 민주화도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해결하려 했다.

반대로 좌파 이념은 사회현상을 모두 사회정의틀 안으로 단순화시킨다. 예를 들면 노사(勞使)관계를 노(勞)는 선(善), 사(使)는 악(惡)이라는 전제로 접근한다.

그러나 현실은 노(勞)쪽도 조합원.비조합원.외국인 근로자가 있고, 사(使)쪽을 보더라도 노동조합 간부보다 어려운 중소기업사장도 부지기수다. 이런 현실을 이념의 틀에 맞추면 노동자는 약자고 기업주는 강자로 단순화되는 것이다. 그런 도식을 갖고는 복잡한 현실에 대한 적절한 처방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념주의는 권력만능으로 빠져들기 쉽다. 사회는 각 분야가 자율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건강해진다. 경제.사회.문화는 각자의 영역이 있다. 그러나 이념 우선의 사회가 되면 모든 분야가 이념의 구현이라는 명분 아래 권력에 종속되고 만다.

盧대통령은 얼마전 "향후 5년 동안 경제계와 노동계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사회에 이런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느냐 여부는 차치하고 권력이 노사라는 사회적 관계를 강제할 수 있느냐다.

이 사회적 관계에 권력이 개입한다면 결국은 노(勞)나 사(使)의 어느 한 쪽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는 권력만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가 일당 독재로 귀결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념 우선주의는 집권자들을 독선과 오만에 빠지게 만든다. 이념을 신봉하여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선(善)의 집행자인 양 착각한다. 자신들은 악(惡)과는 결코 관련이 없는 좋은 사람들이며 자신들의 권력 행사는 약자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결국 국민은 이 선한(?) 권력자의 의도나 방식대로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선한 권력이란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때문에 민주주의나 개인의 자유는 멀어지는 것이다.

이념주의는 실용성에 관심이 없다. 사회정의가 우선이고 불의를 때려 눕히는 것에만 관심이 크지, 실제 국민의 생활에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때문에 만들어 내기보다는 허무는 데 능하다. 신중하고 차분하게 일을 하기보다는 비분강개와 격정으로 운동을 주도하게 만든다.

*** 50년 축적을 바꾸는 5년 정권

이념주의는 역사를 무시한다. 지금이 있기까지는 나름의 이유와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념 우선은 그 이념에 맞게 이를 하루 아침에 바꾸고 싶어한다. 5년의 정권이 50년의 축적을 바꾸는 것이 과연 온당할까.

나는 盧대통령이 5년 동안 훌륭한 업적을 남기는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념의 장막에 갇혀서는 안된다. 그는 이를 부인했지만 솔직히 많은 사람은 그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비서진의 구성이나 그의 주변이 이런 우려를 낳게 만드는 것이다. 이념이 아니라 일에 전념하는 대통령이 되시라. 이념 추구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것이 아니라 행복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고자 하는 보통국민들에게 축복과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되시라.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