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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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석 변형태씨는 본래 영문학자로 고려 대학교육로 있던 것을 이승만 대통령이 발탁하여 필리핀대사로 임명한 것이 시초가 되어 외무부장관,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는데 당시 자유당정권으로서는 군계일학과 같은 존재였었다.
필자하고도 개인적으로 매우 친근하였으므로 영친왕의 일을 이야기만 하면 누구보다도 가장 이해를 해 주리라 믿었는데 뜻밖에도 필자에게『그 일에는 너무 깊이 관계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게 되니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째 그러냐고 그 연유를 물었더니 변 장관은『선생님 (이 대통령)께서는 영친왕에게는 애국심이 없다고 퍽 좋지 않게 생각하고 계시므로 공연히 ×선생까지 그 일에 말려들어서는 아니 되겠기에…』라고 하는 것이 까닭은 역시 아까사까(적판)저택 문제에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또『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동경의 영친왕 저로 말하면 애초에 국유가 될 수 없는 것을 국유로 하여 거저 빼앗으려 다가 실패한 것이오, 영친왕은 나라에서 쓰겠다니까 손해가나더라도 대표부에 팔겠다고 헐값으로 가격까지 정해놓은 것인데 약속은 하나도 이행을 하지 않고 도리어 영친왕을 비애국자로 본다면 영친왕이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 그러니 과잉충성을 일삼는 속리들은 몰라도 적어도 선생은 마땅히 대통령께 그 오해를 푸시도록 해드려야 될 줄 압니다. 따라서 저택과 여권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니까「패스포트」도 곧 허가토록 하십시오.』
그러나 꼬장꼬장하고 정직하기로 이름난 변 장관도 웬일인지『영친왕 일은 대통령께 말씀한대도 잘될 것 같지 않다』고 하여 경무대에 가기를 꺼리었다. 마치 엄친시하에 있는 어린애 모양으로 노 대통령 앞에 가서는 감히 말을 못 꺼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에는 만송 이기붕씨를 심방 하였다.
그는 당시 국회의장으로 정계의 넘버·투맨(제 2인자)으로 지목되었으며 후일 4·19혁명 때 일가가 구몰하는 참화를 당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인간미가 풍부한 선량한 신사였다.
나는 우선 8·15해방으로 국제적 고아가 된 영친왕의 고독한 처지로부터 시작하여 동경 저택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분규를 이야기하고 아들 구씨의 졸업식에 가기 위한 것이니 미국에 가는 패스포트만은 곧 나오도록 경무대에 말해 달라고 말했더니 그도 역시 난색을 보이면서『세상 사람들은 내가 말만하면 대통령께서 다 들어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인즉 내가 열 가지를 말씀해서 그 중 한 두 가지만 되어도 잘된 것으로 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다 된 일도 비서들의 방해로 틀린 것도 있고…. 그러므로 무슨 일이고 대통령께 상신 할 때에는 신중이 고려를 해야 되는데 영친왕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심중이 대단히 좋지 않으시므로 내가 말씀을 여쭌대도 별반 효과가 없을 줄 압니다』라고 변 장관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대통령이 영친왕에 대해서 그토록 심각한 감정을 품은 것은 무엇보다도 아랫도리 관료들의「과잉 충성」으로 말미암아 영친왕을 덮어놓고 욕심장이로 판정한 때문이므로 외무장관이나 국회의장이 중간에 들어서 잘 말씀한다면 대통령의 오해도 풀릴 것이고 노여움도 가시리라고 믿었었는데 그 두 분마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드는데는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영친왕께는 죄송하였지만 경무대를 방문할 예정도 중지하고 이일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본국의 분위기는 이 대통령이 영친왕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니까 정부의 하급관료들은 덩달아서 영친왕을 경원하였으며 일반 민중들도 자신에게 무슨 화가 미칠까 해서 영친왕은 물론 구 왕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몹시 꺼리었다. 변 장관이 필자더러 그 열에서 손을 때라고 한 것도 그러한 분위기를 말한 것이었다.
나는 영친왕께 곧 상서를 하고 본국에서도 패스포트가 잘 아니 되어 미국에 가시는 일은 중지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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