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의 8·15 통일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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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박 대통령은 8·15경축사를 통해, 북괴가 만일 전쟁 도발행위를 즉각 중지하겠다고 선언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증한다면 『남·북한에 가로놓였던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고 말함으로써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하였다.
스스로 『통일기반 조성을 위한 접근구상』이라고 설명한 그의 제안의 골자는 북괴에 대하여 세 가지 조건의 수락과 그 성실한 실천을 촉구한 것으로서, 만일 이러한 조건들이 완전히 충족된다면 지금까지 금기되었던 남·북간의 교류나 접촉 등도 『보다 현실적인 방안』의 하나로서 논의될 수 있음을 비침으로써 한국 국민에게는 오히려 충격적인 「뉴스」였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엄격한 선행조건부 제안>
그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은 ⓛ북괴가 무장공비의 남파 등 일체의 전쟁 도발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에 의해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해오던 종전 태도를 완전 포기할 것을 선언하고, 이를 실천에 옮길 것 ②한국의 민주·통일·독립과 평화를 위한 「유엔」의 노력을 인정하고 그 권위와 권능을 수락할 것 ③무고한 북괴동포의 민생을 희생으로 한 전쟁준비를 포기하고, 민주주의 체제와의 선의의 경쟁에 나설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행조건의 성실한 이행이란 김일성 도당들에게는 곧 자신들의 존립자체의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북괴가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전무한 것이며, 그런 한에 있어 박대통령의 구상은 국내적으로 우리의 반공태세에 조금이라도 변동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외교상의 「이니셔티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발언이 국내외에 충격적인 파문을 던질 요소를 다분히 가졌음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국외에 대해서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발언은, 비록 사실상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엄격한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통일문제에 관하여 과거 20년간 거의 화석처럼 굳어져있던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에 처음으로 유연성 있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반영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변화가능성의 시사는 최근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진 동서간의 해빙「무드」와 팽배한 평화 기운 등 국제조류 가운데서 국제적으로 한국에 대한 인상을 호전케 하고, 더 많은 외교적인 지지를 획득케 하는데 크게 유조할 것이 확실하다. 이점, 박대통령의 8·15구상이 무엇보다 외교적인 고려를 중시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는 미·소 양 대국의 공존체제의 확립, 서독·소련의 불가침조약체결, 중소분쟁으로 노정된 「이데올로기」전쟁의 퇴색화, 「우·탄트」「유엔」 사무총장에 의한 「유니버설리즘」의 제창 등, 일련의 국제정세의 변화는 「유엔」무대에 있어서도 날이 갈수록 한국의 철저한 반공주의적 입장을 곤란케 하고 있었거니와, 이에 곁들여 끈질기게 전개돼온 북괴 측의 교묘한 위장평화 통일공세로 말미암아 「유엔」에서의 한국 지지표 유지에도 중대한 위협이 가중된 것이 오늘의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세 하, 우리 정부가 통일문제에 대해 보다 능동적이고 전진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써 국제적인 「이미지」개선에 「이니셔티브」를 취한다는 것은 극히 필요하고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변함없는 과제 「힘의 배양」>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런 구상이 발표됐다하여 국내적으로 곧장 우리의 통일정책에 어떤 근본적인 전환이 있을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박 대통령도 지적했듯이 『국토통일이 아무리 절실하다 하더라도 동족의 유혈을 강요하는 전쟁만은 피하여야』하고, 또 그런 한편 『전 국토 요새화, 전 인민 무장화』의 「슬로건」아래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고 있는 북괴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상 결국 모든 면에서의 『힘의 배양』이란 잠시도 게을리 할 수 없는 현실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박대통령이 이번 연설에서 북괴에 대하여 『선의의 경쟁』을 운위한 것이 논리상 북괴라는 불법집단의 존재의 사실상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의 당연한 의문에 대해서도 국민으로서는 마땅히 그 진의를 정확히 파악해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의 상기 발언은 한반도의 북반부를 강점하고 있는 반 국가 단체로서 엄연히 사실상 존재하고 있는 북괴에 대하여 국가 원수로서 다시 한 번 그들의 불법적인 무력사용포기를 명령함으로써 법적으로는 재차 「항복」을 요구한 것 이외의 타의가 있을 수 없음을 명백히 인식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특히 경계해야할 것은 이로써 국내·외에 평화통일「무드」가 조성되어 이로 말미암아 일종의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서는 안되겠다는 점이다. 해방 후 20여년간 우리나라에서는 통일논의가 일종의 「터부」시 돼왔고, 때로는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돼왔는데, 이번 박 대통령의 선언을 계기로 통일론을 에워싸고 국내적으로 혼란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공화당은 박대통령의 전기 성명과 관련하여 재빨리 반공법·국가보안법 등의 개정 용의까지 표명하고 나섰는데, 이러한 법개정만으로는 평화통일 논의를 완전 개방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헌법적 요청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급한 통일「무드」경계>
북괴는, 반공법이나 국가 보안법 말고서 형법상으로도 내란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범죄집단인데, 이는 우리의 국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전체에 미친다고 규정한 우리의 헌법상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 것이다. 서독의 경우, 국민이 동독에 왕래하거나 서독 정부 자신이 동독의 사실상 또는 법적 승인까지를 고려할 수 있는 것은 그 기본법(헌법)자체가 그 전문 및 본문 1백 46조에서 서독 영역만을 규율하는 「잠정법」임을 못박고 있기 때문인 것이며, 이 점 처음부터 완전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존립을 규정한 우리 헌법정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박 대통령의 새 평화통일구상은 누구의 눈에도 전진적인 것이요, 이는 우리 국력의 신장의 결과로 나타난 강한 자신에 입각한 것으로 통일에 대한 겨레의 숙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열열한 환영을 받을만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한바와 같이 우리의 현행 헌법 하에서는 여하한 형태로든지, 북괴가 주장해오던 남·북간의 직접대화나 남·북 연방론 또는 동시 선거론 등은 엄연히 국헌에 위배되는 것인 만큼 누구도 이 점에 대한 경각심을 놓아서는 안될 것임은 물론이다. 만일 부질없는 통일논의와 성급한 법 개정론 등으로 사회불안을 조성하거나 감정적인 선거「이슈」로 화한다면 이는 우리의 국익신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만을 조성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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