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종마와 와인의 멋진 앙상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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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호 23면

말 달리는 기수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마치 사진으로 순간 포착한 긴장된 모습을 빠르게 스케치해 놓은 것 같은 그림이다. 와인 레이블에 기수를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증은 말굽 모양과 포도나무 잎 문장이 나란히 찍혀 있는 레이블 아랫면에서 더욱 증폭된다. 그 위로 하라스(HARAS)와 엘레강스(elegance)란 글자도 함께 보인다. 말·기수·말굽, 그리고 포도 잎…. 이 상관관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김혁의 레이블로 마시는 와인 <20> 하라스(HARAS)

이 역동적인 와인 레이블은 칠레의 와인 명가로 떠오른 ‘하라스 데 피르케(Haras De Pirque)’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 ‘엘레강스’다. 오너는 폴로 선수 출신인 에두아르도 A. 마테. 그는 1980년대 종마 사업을 시작했고 1991년 마이포 밸리의 피르케 지역에 와이너리 ‘비나 하라스 데 피르케(Vina Haras de Pirque)’를 설립했다. 하라스 데 피르케는 1892년 세워진 칠레 최고의 경주마 목장 이름이기도 한데, ‘피르케의 종마장’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라스 데 피르케에서 배출한 종마는 북미와 남미 지역을 비롯한 다양한 경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왔다. 말을 사랑하고 고급 와인을 만들겠다는 오너의 열정은 와이너리 이름도 말에 관한 것으로 지었고 실제로 와이너리 포도밭 아래에는 종마장을 만들어 놓았다.

와인 레이블은 프랑스 인상파의 거장 에드가 데 드가의 작품에서 가져왔다. 주로 발레리나의 역동적인 모습을 순간 포착해 그림으로 그려온 드가는 말 경주나 기수에 관한 작품도 많이 남겼다.

이 와이너리 건물은 말굽 모양으로도 유명하다. 레이블에 나와 있는 말굽이 바로 이 건물이다. 또 각 건물을 경사지게 만들어 중력의 힘을 자연스럽게 이용해 와인의 맛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와인과 종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연결하는 멋진 해결책을 고안해 냈다. 말들의 오물과 양조장 부산물을 섞어 천연 비료를 만들었던 것. 이것을 포도밭에 뿌려줌으로써 일거 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급기야 2003년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 가문인 안티노리와 손잡고 ‘안티노리 & 마테사’를 설립,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프랑스 로칠드 가문이 칠레 콘차이 토로와 합작해 만든 알마비바를 능가하는 와인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거쳐 엘레강스는 알마비바를 제치고 2004년 최고의 와인으로 등극했다. 말굽과 포도 잎의 문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말을 사랑한 데서 시작한 마테 가문의 와인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들이 선택한 기수 레이블은 와이너리가 변화해가는 역동성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이 달릴 때 기수는 보통 정면을 향해 머리를 고정시키지만 여기서 기수는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부리고 있다. 혹시 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여유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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