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 이라크전 트라우마 … 시리아 공습 멈칫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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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에서 화학무기가 사용됐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유엔 조사단 요원들이 28일(현지시간) 시리아 다마스쿠스 인근 아인타르마에서 시료를 채취한 뒤 이동하고 있다. [아인타르마 로이터=뉴스1]

초읽기에 들어갔던 시리아 공습이 곳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29일(현지시간)로 예상됐던 ‘D데이’도 다음 주 초로 연기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공습 연기론의 단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만들었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그는 28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시리아 현장의 유엔 조사단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선 4일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뉴욕에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영국이 제출한 시리아 군사제재 결의안이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에 막혀 무산된 직후 나온 발언이었다. 유엔 조사단은 31일 오전 시리아에서 현장조사를 마치고 철수할 예정이다.

 반 총장의 발언은 곧바로 미국과 영국 정치권에 2003년 이라크전쟁 ‘트라우마’를 일깨웠다. 당시 미·영은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WMD)’를 확보했다는 성급한 결론을 근거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가 나오지 않자 쏟아진 국제사회 비판에 체면을 구겼다. 애초 시리아 공습에 찬성했던 영국 야당인 노동당이 반 총장 발언 후 “유엔 조사단의 조사 결과부터 지켜보자”는 입장으로 선회하자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29일 표결 처리하려던 시리아 공습 동의안 표결도 다음 주 초로 연기돼 주말까지는 영국군의 공습 참가가 어려워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역시 야당인 공화당으로부터 공습 개시 전에 의회의 동의를 받으라는 압력에 직면했다.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이날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엔 18명의 민주당 의원을 포함해 116명의 하원의원이 서명했다. 이 틈을 타 시리아 정부도 지연 전술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리아의 바샤르 자파리 유엔 대사는 반군이 지난주 세 차례 더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증거를 담은 자료를 유엔에 제출했다. 유엔 조사단의 조사활동을 연장해 서방국의 공습을 최대한 늦춰 보자는 계산이다.

 러시아·이란도 시리아 정부 편에서 지원사격에 나섰다. 특히 이란은 서방국이 시리아를 공습하면 이스라엘에 보복공격을 가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시리아 공습이 자칫 중동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겁준 셈이다. 이에 맞서 오바마 정부도 여론전에 나서고 있다. 이르면 29일 시리아 정부가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증거를 공개할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는 28일 “시리아 정부가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못 박았다. 아울러 “미국은 자체 증거로 판단해 독자 시간표에 따라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등의 지원이 없어도 필요하다면 즉각 공습에 나설 수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3일 오바마의 스웨덴 방문 전에 시리아에 대한 군사조치를 끝내기를 원한다고 분석했다. 오바마는 5~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스웨덴을 들른다. 서방의 시리아 공격에 강한 반대 입장인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대면하기 전에 시리아 문제를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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