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사막의 순례자'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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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순례자/테오도르 모노 지음, 안인성 옮김/현암사, 8천5백원
내가 믿는 세상/에르네스트 F 슈마허 지음, 이승우 옮김/문예출판사, 1만2천원

"내가 확신하지만 현재 상황은 이전의 어떤 불황이나 경기 후퇴 등과 공통점이 없다. 이는 한 시대의 종언이다. 누가 말했듯이 잔치는 이미 끝났다. 그것이 과연 어떤 종류의 잔치였는가. 그것은 소수 몇몇 나라들의 잔치였으며, 또 그들 나라 소수 사람들 사이의 잔치였다."(36쪽)

예사롭지 않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유명한 경제학자 E F 슈마허(1911~77)가 만년 저술 '내가 믿는 세상'에서 풍요.과잉의 우리 시대를 이렇게 질타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한세대 뒤 자연주의자 테오도르 모노(1902~2000년)의 책에서 메아리로 되울려 나오고 있다.

프랑스의 존경받는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였지만 생애 내내 '축복받은 통렬한 고독의 땅'이라고 규정한 사막 순례를 실천했던 그의 명상 에세이 '사막의 순례자'는 영성(靈性)의 울림마저 갖는다.

"도시는 과잉을 통해 우리를 침몰시킨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의 홍수, 쓸데없는 말의 안개들…. 모두가 삶의 단순함을 잃어버린 채 끔찍한 쳇바퀴에 갇혀 있다.

반면 사막은 경박하고 불필요한 것에서 벗어나는 법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속의 침묵과 고요함은 풍요롭다."(91, 99쪽)

슈마허와 모노는 서구의 일급 지성들이다. 서로의 영역은 달랐지만 그들은 지난 세기 문명사적 성찰을 감행한 현자(賢者)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를테면 국내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정도가 소개되는데 그쳤던 슈마허의 이번 번역서는 "경제학은 돌연변이에 다름 아닌 지난 2백년간의 물질문명을 정당화해주는 논리체계"라고 비판한다. 그의 목표는 경제학을 넘어선 경제 형이상학(meta-economics)이었다.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활동했으니 범(汎)서구인인 슈마허의 이런 성찰이 구체화된 것은 1968년에 선보인 '불교 경제학'.

이 책은 영국 정부의 경제고문 자격으로 미얀마에 가서 얻은 깨달음에 뿌리를 둔다. 슈마허는 "미얀마는 경제학의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번에 번역된 책은 문명비판 에세이. 책에서 슈마허는 지금의 근대문명이란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문명"이라면서 '전혀 새로운 가치'를 역설하는 예언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생태 마인드와 함께 절제와 금욕이라는 윤리적 가치가 담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그의 메시지가 영락없이 세례 요한 식의 '빈들에 외치는 소리'로 들려온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현재의 주류 학문과 가치를 뒤집으려는 전복적 성격 때문일 게다. 그런 전복적 성격은 '사막의 순례자'의 경우 한 술 더 뜬다.

모노는 3년 전 타계했을 때 프랑스에서 "우리 세기의 위대한 정신"으로 추앙됐던 거물. 그러나 이번 책은 국내에 소개되는 첫번째 책인데, 책 제목대로 사막을 성소(聖所)로 삼았던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다.

책 뒤의 '저항하기'편을 보면 그가 그린피스, '지구의 친구들' 같은 비정부기구(NGO)의 지주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 사람들에게 모노는 현대사회의 삶이 피할 수 없는 공허감을 채워주는 상징이었다. 그 상징은 거의 종교적 기능을 맡았다.

책의 몸통인 '벗어나기'편이 유독 그렇다. 그 대목은 요즘 국내 독서시장에서 유행하는 '느림에 대한 성찰'과 또 다른 깊이를 보여준다. 그건 모노가 신학자 테일라르 드 샤르댕의 지기(知己)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고생물학자이기도 했던 예수회 신부 샤르댕은 지구문명사를 단위로 한 신학적 비전을 제시한 인물.

"기독교 복음이 지난 정신적 보화는 아직 역사 속에서 실현된 적이 없으며 그것의 실현이야말로 앞으로 인류의 몫"이라고 단언했다. 모노 역시 샤르댕 못지 않은 장려한 문명사적 선언을 내린다.

"샤르댕과 나는 인간이 완성되려면 멀었으며, 아직도 사용되지 않은 정신.육체적 에너지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확신했다."(54쪽) "나는 새로운 인간에게 기대를 건다. 새로운 인간이란 어떤 르네상스 과정을 거쳐 불필요한 수많은 것에서 벗어난 존재를 의미한다."(98쪽)

모노가 말하는 '새로운 인간'이란 까마득한 높이의 영성만은 아니다. 그의 말을 마저 들어보자. "구원이란 장인적인 것, 소박한 것, 침묵, 그리고 '활기를 내포한 느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통상적인 정보와 많이 다르고, 요즘 거의 패션화된 유형의 책들과는 거리가 있는 '내가 믿는 세상'과 '사막의 순례자'는 책 읽는 방식부터 달라야 할지 모른다. 누구의 고백처럼 맛있는 음식 아껴 먹듯 음미하듯 읽어볼 만하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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