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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당의 가로디 파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르·몽드=본사특약]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두브체크노선의 대두와 이에대한 소련의 무력탄압은 공산주의의 이론과 실제에 충격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이 파동의 연속속에서 가장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 것이 프랑스 공산당과 소위 가로디사건이라하겠다. 프랑스 공산당은 원래 이탈리아 공산당과 더불어 가장 비교조적인 리버럴·그룹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이론가이며 철학교수인 동시에 61년이래 정치국원이던 로제·가로디는 반스탈린주의의 기수였다. 이른바 네오·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기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는등 가로디이론은 게오르그·루카치나 에른스트·블로흐와 더불어 공산세계의 이단적 입장으로 지목되었다.
소련의 체코 침공에대해서 가로디를 필두로 한 프랑스 공산당지도부는 맹렬히 반발했다. 그러나 발데크·로셰가 사망하고 조르지·마르셰가 당의 지도권을 장악한뒤 프랑스 공산당은 태도를 서서히 바꾸기 시작했다. 크렘린의 입김을 강하게 느낌과 동시에 당자체의 동요를 막기위해 당내 강경파들은 소련의 개입을 정당시하고 두브체크노선의 반사회주의적 성격을 규탄하는 입장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체코사태비난이 발단>
이에대해 가로디는 계속 반소적 자세를 굳히고 당지도부의 배신과 비열성을 비난했다. 가로디와 실권파사이의 대립은 지난 2월 낭테르에서 열린 제19차 당대회때 절정에 달했다. 정치국원의 직위를 박탈당한 가로디는 짧은 신상발언을통해 자기의 입장을 옹호했다. 가로디파문으로 일관한 프랑스 공산당의 마르셰일파는 다시 지난 5월20일 당중앙위에서 그의 당적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출당의 계기가 된 것은 두브체크와 로셰의 대화내용을 둘러싼 것이다. 가로디에 의하면 마르셰 현당료파는 68년7월의 두브체크·로셰사이의 밀담을 현 체코당국에 넘겨주어 두브체크 탄압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 요담을 기록한 문서에 의하면 두브체크·스므르코프스키의 체코 자유파가 사회민주주의 분파를 다시 독립된 정당으로 분가하는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두브체크탄압 구실주어>
당시 체코 자유파정권이 68년5월 베치네등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회동하여 이 문제를 심각히 토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신중론을 박차고 추진되던 사회민주당 재건운동과 복수정당제도에의 시도는 치에르나 및 브라티슬라바 회담과 동구제국의 침공으로 무산되었다.
가로디가 폭로한 것은 그 요담기록의 내용이 아니라 마르세일파가 그 문서를 현 체코집권자들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이다. 가로디의 공격에대해서 프랑스 공산당기관지 위마니테지는 5월18일자에 이 문서를 공개, 두브체크파의 우경성을 여봐란듯이 지적했다. 이에대해 가로디는 그 문서를 공개했다는 사실은 마르세일파의 행위를 자인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격했다. 당료파는 구스타프·앙사르 정치위원회 간부의 입을통해 장문의 논고를 발표하고 가로디축출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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