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풍류 가락 … 고궁을 깨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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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창경궁 명정전 뒤뜰에서 17일 오전 열린 ‘창경궁의 아침’에서 양선희씨가 노랑 앵삼을 입고 궁중무용 ‘춘앵무’를 추고 있다. [사진 국립국악원]

아이는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웠다. 과일을 나눠 먹는 가족들이 정겹다. 차일을 치고 방석 위에 앉으니 잔칫집에 온 듯 풍류가 절로 인다. “창경원 시절에 와보고 처음이야. 이제야 조선시대 궁궐 자태가 나네.” 부채질을 하던 어르신 한 분이 감회에 젖어 궁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17일 오전 7시 서울 창경궁 명정전 뒤뜰. 곧 시작될 음악회 ‘창경궁의 아침’를 기다리는 남녀노소 500여 명이 이른 햇살 속에 소곤소곤한다. 국립국악원(원장 이동복)이 2008년부터 시작한 고궁 아침공연은 이제 고정 팬이 생길 정도로 소문이 났다.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7시 30분에 여는 이 행사는 6년 내리 매진됐다.

 “명정(明政)이란 올바른 정치란 뜻이죠. 이곳에서 정갈한 음악 들으시며 유난스런 더위를 씻으시기 바랍니다.”

 연주회 해설을 맡은 하주용 서울예대 부총장은 사근사근 음악과 악사 소개를 했다.

 “처음 들으실 가곡(歌曲)은 기악반주에 맞춰 부르는 한국 성악곡의 대표입니다. 요즘 말로 밴드를 거느려야 노래가 나오죠. 시조를 노랫말 삼아 우아하고 격이 높지만 노래 가사가 귀에 안 들어올 만큼 모음을 길게 늘여 부릅니다. 가곡을 전공한 저도 쉽게 알아듣기 힘들 정돕니다.”

 피리·대금·단소·해금·거문고·가야금·장구로 이뤄진 국립국악원 연주자 7명이 소리 길을 여니 남창(男唱) 이정규, 여창(女唱) 이준아씨가 꼿꼿한 자태로 “아~아~아~~~~” “오~~~오~ 오~~~” 묵직하면서 맑고 고운 가곡을 들려준다. 고즈넉한 궁궐에 울려 퍼지는 유장하면서도 투명한 소리가 듣는 이들 가슴을 서늘하게 식혀준다. 즐겁되 넘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은 절제된 감정이 두 창자의 무심한 얼굴에 담겨 있다.

 두 번째 무대는 춤이다. 한국음악의 준말인 국악(國樂)은 음악과 무용을 아울러 일컫는데 이날 선보인 춤은 정재(呈才) ‘춘앵무’다. 궁중 잔치에서 임금에게 바치던 춤의 하나로 봄날 아침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의 자태를 단아한 몸짓으로 보여준다.

 “열세 겹 옷을 입고 방석 두서너 장 붙인 크기의 화문석 위에서만 추는 아주 어려운 춤입니다. 어깨를 들썩여도 안 되고 천박한 미소도 안 됩니다. 그야말로 고요 속에 움직임, 정중동(靜中動)이죠.”

 대금 산조의 원완철씨는 득의의 연주를 들려줬다. 마지막 장구 소리가 울리자 숨죽였던 객석에서 뒤늦게 “얼씨구, 좋다!” 찬탄의 추임새가 터졌다. 소리를 밀고 당기며 느림과 빠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연주자는 피를 토하듯 마지막 음을 쏟아놓고 바람처럼 잦아들었다.

 이날 마무리는 풍류의 백미라 할 ‘현악영산회상’이 장식했다. 18명 단원이 모두 나와 거문고를 중심으로 합주를 들려줬다. 창경궁의 아침이 소리를 타고 하늘로 떠올랐다. 오래 전 임금이 들으시던 소리를 지금 만백성이 그 자리에 와 듣는다. 음악의 길은 길고 인간의 삶은 덧없다.

 음악회가 끝나고 원하는 관객은 궁중해설사와 창경궁 산책에 나섰다. 24일과 9월 7일 명정전 공연은 무료, 31일과 9월 14일 통명전 실내 공연은 3만원이다. 국립국악원 누리집(gugak.go.kr)에서 선착순 신청을 받는다. 02-580-3320.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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