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아시아」대법원장회의에 다녀와서(하)|<대법원장>민복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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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캔버라시에 도착한 4월5일 하오에 부의장인 국립도서관 회의실에서 예비회담이 있었고 다음날인 6일 상오 10시에 국립극장에서 개회식이 있었다.
이번 회의에는「아프가니스탄」과「실론」이 불참하여 17개국의 대법원장이 참석을 하였다. 개회식에는 호주의 원수인「해즐럭」총독의 치사가 있었고 다음에 1967년에 제3차 회의를 주재하였던 태국의「후타싱」대법원장의 연설에 이어서 이번에 새로이 참석한 네팔·서「사모아」등 5개국을 대표해서 본인이 연설할 기회를 가졌다.
나는『우리 한국이 정부수립이래 지난 20여년간 공산주의의 끊임없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법의 지배를 실현하고 나아가서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으며,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건설을 해야한다는, 우리민족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과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강조하는 한편,『이번 회의에 참석한 아시아 제국의 여러 대법원장과 공통된 법적문제를 토의함으로써 상호간의 법문화와 사법제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되며 이 회의를 통하여 얻은 결과는 한국에 있어서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을 언급하였다.
개회식에는 호주법조계와 이번 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외교 사절단이 전부 초대되었고, 한국에서도 주호대사관의 참사관이 참석을 하는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4월 7일부터 캔버라시 소재 국립도서관 회의실에서 회의가 시작되었는바 이번 회의의 의제는 형사상 피의자와 피고인의 권리보호에 관한 것으로서 제1, 2차 회의에서는 신문과 구속, 또한 경찰에서의 자백의 증거 능력등을 중점적으로 논의하였다.
제3, 4차 회의에서는 공판절차에 있어서의 피고인의 묵비권이 논의되었으며 또한 피고인의 전과가 판결때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가도 토의되었다.
제5, 6차 회의에서는 첫째로 한편에서는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범죄로부터의 사회의 보호라는 일응 양립하는 두 가지를 어떻게 균형있게 다루느냐는 것과 둘째로 피고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면 신속하고 정확한 재판을 하느냐는 것과 세째로는 오늘날 일반 국민, 특히 젊은 세대의 재판에 대한 불신의 경향을 어떻게 시정하느냐는 것등이 논의되었다.
한국·일본·자유중국·월남등은 대육법 계통이고 그 나머지 호주·인도·파기스탄등 제국은 영-미법 계통에 속하기 때문에 회의를 진행함에 따라 서로 각기 다른 법제도에 대하여 많은 이해를 갖게 되었고 사법제도를 현대화 함에 있어 많은 참고될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4월6일 저녁에는 총독관저에서 환영연이 있었고, 4월8일 저녁에는 호주 내각수반의 초대가 있었다. 나는 이분들과 만나서 6·25 당시 호주정부가 많은 희생을 무릎 쓰고 우리나라를 도와 준데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였고 앞으로도 경제적인 유대를 두터이 하여줄 것을 부탁하였다.
회의가 끝나는 날 자유중국 대법원장의 제의에 의하여 다음 1972년 10월에 개최될 제5차 회의는 한국 서울에서 개최하자는 것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서울이 다음 회의의 개최장소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사법부에 대한 아시아 제국의 관심도가 높다는 것이며 우리는 다음 서울에서 개최되는 회의에서 한국법 제도를 아시아 각국의 대법원장들에게 소개하는데 힘써야 할 줄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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