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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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유치환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은 갑자기 몰아닥친 신의 시샘으로 종점을 맞는다. 1967년 2월 13일 오후 9시30분 부산 미성극장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청마는 시 쓰기와 편지 쓰기에 들었던 붓을 영영 놓게 된다.

1908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청마는 통영.부산.경주 등 지방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46년에는 창립 조선청년문학가 회장으로, 57년에는 초대 한국시인협회장으로 피선되는 등 그의 영향력은 중앙문단도 휘어잡는 위력이 있었다.

유치환의 부음을 듣자 시인 박성룡은 기자로 일하는 '주간한국'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 하였네라"의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과, 주고 받은 편지를 두 쪽에 걸쳐 가득 실었다. 이름 있는 출판사들은 다투어 이영도에게 청마의 편지를 내자고 달려든다.

그러나 이영도는 '뭍'같이 까딱 않는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유치환을 여읜 슬픔도 슬픔이지만 보배 같은 그의 편지를 세상에 까발릴 만큼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유치환이 간 지 두 달 뒤쯤인 4월 어느날 "근배, 니 부산좀 내려오거래이" 뜻밖에도 부산에서 걸려온 이영도의 전화를 받았다. 새로 생긴 중앙출판공사 편집장에 취직한 나는 책 한 권은 커녕 문패의 먹도 마르기 전인데 큰 시인들을 앞세운 대형 출판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림없는 줄 알면서 "저도 출판을 하고 싶은데요"하고 응석을 부려두었던 터였다.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은 이영도의 집은 동래 금정산 기슭 양지바른 터에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규방에는 유치환이 준 사랑의 시를 손수 수 놓은 열 폭 병풍이 둘러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이영도를 두 세 번 밖에 만난 일이 없었다. 충청도 촌뜨기라 부산 쪽과는 길이 닿지 않았고 이영도도 서울 오는 편이 뜨악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어쩐일인지 62년엔가 이영도의 서울 나들이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아주 예뻐해주었다. 또랑또랑한 시인 세 사람에 이형기.박재삼을 쳐들면서 그 밑에 내 이름을 달아주기도 했다.

내가 부산에 내려간 날은 바로 부산의 문인들이 청마추모문학제를 올리는 날이었다. 나는 소복 입은 이영도와 맨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이영도 말고도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다섯이나 내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영도는 그 많은 편지 보따리를 선뜻 내게 내주었고 국제신문 문화부장이면서 아동문학가인 최계락과 나는 동래 금호장 호텔에서 그 편지들을 대충 추려 서울로 올라와 '청마 유치환시인이 규수시인 이영도 여사에게 20년간 보낸 사랑의 서한집'을 책으로 묶어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돼, 무명 중앙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 일로 해서 이영도와 나는 어머니와 아들만큼이나 살가운 사이가 되었고 편집장에서 주간으로 일자리도 튼튼하게 되었다. 그러면 왜? 이영도 그 깔끔한 성격이 편지 보따리를 풀렀을까?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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