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분주소서 만난 공포 질린 주민들 … 내겐 쇼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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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북한이 종교 탄압국이면 미국은 종교 테러국’이라고 주장했던 신은희 경희대 교수는 자신의 과거 대북관이 지엽적·감성적이었다고 했다. [구윤성 인턴기자]

신은희(44)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교양학부의 별칭) 교수는 ‘주체사상의 전도사’로 불려왔다. 서울 태생으로 캐나다 국적을 취득한 종교 철학자인 신 교수는 숱한 친북성 발언으로 화제를 뿌렸다. 김일성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인 주민들을 “예수의 주검 앞에서 우는 여성들처럼 보인다”고 하고, 2004년 용천 폭발사고 때 김일성 초상화를 꺼내오려다 숨진 교사를 순교자로 묘사해 논란을 빚었다. 그에게 친북 좌파란 꼬리표가 붙어다니는 이유다.

 그랬던 그가 김정은 체제의 북한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신 교수는 지난 3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특권을 가진 상위 1%중심의 사회”라며 “북한사회의 계급주의는 참으로 거부감이 드는 힘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에 대한 희망이 10년 만에 절망으로 바뀌었다”며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북한 김정은 체제의 종착역은 중동 민주화를 가져온 자스민 혁명과 같은 것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을 보는 시각의 변화, 즉 ‘전향(轉向)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신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 아이오와주 심슨대(종교철학부) 교수로 있던 2003년 3월 학문적 관심과 봉사활동 목적으로 처음 방북했다. 이후 2006년까지 4차례 방북하며 김일성대학과 평양외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했다. 어머니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이라는 것 외에는 북한과 인연이 없다.”

 신 교수는 대학 졸업 후인 90년대 초 캐나다로 이민해 토론토대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방북 경험을 토대로 저서, 인터넷 등을 통해 북한 관련 글을 써왔고 2008년부터 경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 방북기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북한을 ‘북조국’이라고 호칭하는 것부터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2005년 12월 한 인터넷 매체에 올린 글에서 ‘북한에 미국식 종교자유를 들이대는 것은 문화적 차원의 종교 테러리즘이다. 북이 종교탄압국이라면 미국은 종교테러국’이라고 말했는데 반발이 컸다. 방북 경험을 토대로 남북한을 연인관계를 표현한 책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없을까』도 마찬가지였다.”

 - 주체사상을 기독교와 같은 종교로 묘사해왔는데.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 노동당은 어머니, 수령은 아버지, 인민은 자녀라고 주민들을 세뇌하면서 ‘어느 부모가 자녀에게 나쁜 것을 주겠느냐’고 북한은 주장한다. 인민이 왜 어린아이냐. 충분히 수령이나 체제를 비판하고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 왜 생각이 바뀌었나.

 “세 번째로 평양을 방문한 2006년 독특한 경험을 했다. 연락처와 주요 메모가 담긴 다이어리를 잃어버려 분주소(우리의 파출소)를 찾았는데 보안원들은 나를 스파이 취급했다. 지하 취조실에서 공포에 질려있는 주민들을 봤다. 이런 통제체제에서 무슨 다원적 가치와 문화적 다양성이 가능하겠냐는 생각에 심적 충격이 컸다.”

 - 전향인가.

 “내가 과거 북한 사회를 이해한 것이 굉장히 지엽적이고 감성적이었다는 점에서 전향이라 할 수 있다. 이념적 좌파에서 우파로의 전향이 아니라 종교학적 성찰에 의한 우주적 전향이라 말하고 싶다.”

 - 어떻게 한국 대학강단에 설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노무현정부 때는 통일부가 대학 특강 등에 초청해 ‘북한 바로알기’라며 우호적으로 얘기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2008년 종교철학을 영어로 강의할 교수를 공모하는 데 뽑혔다.”

 - 보혁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사실 답이 없어 보인다. 정권변화에 따라 통일문화 패턴이 달리지고 한때 격려받던 일이 어느 시기엔 악마화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다. 비극의 문명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념의 잣대는 이 세대에서 끝났으면 한다.”

 - 향후 계획은.

 “기회가 된다면 남북과 해외를 오가며 가르치고 봉사 하고 싶다. 북한 학생들에게 해외유학 기회가 주어져 국제화에 공헌할 인재가 됐으면 한다. 10~20년 내에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글=이영종 기자,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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