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지키며 100년 … 카페로 변신한 적산가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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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에 있는 카페 ‘팟알’. 1890~1900년 사이에 지어진 근대 일본 점포겸용주택 ‘마치야(町家)’ 양식의 건물을 그대로 보존·활용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일제강점기 이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하역회사였다. 1층에는 사무실이 있고, 2·3층의 다다미방에선 1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숙식을 하며 제물포항으로 들어오는 배를 기다렸다. 항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는 3층 방의 벽에는 당시 인부들이 남긴 낙서가 그대로 남아있다. 삿갓을 쓰고 걸어가는 스님 그림 옆에 누군가가 일본어로 적었다. “오늘밤은 회식이다.”

하역회사 건물 … 2·3층은 조선인 숙소

‘팟알’ 2층의 다다미방.

 그리고 100여년 후, 하역회사 사무실은 커피와 팥빙수를 파는 아담한 카페로 바뀌었다. 지난 해 8월 인천 중구 관동1가에 문을 연 카페 ‘팟알(pot_R)’이다. 인천 차이나타운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일본 영화에서 자주 봤던 3층짜리 갈색 목조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구한말 일본 조계지(租界地·개항장 주변 외국인 치외법권지역)였던 이 지역에서 내부까지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드문 건물이다. 근대 일본의 점포겸용주택 ‘마치야(町家)’ 양식으로, 좁은 통로를 따라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면 중정(中庭)이 있고 정원 옆에는 작은 살림집이 들어서 있다.

 ‘팟알’을 열기 전 시민단체에서 일했던 백영임(50) 대표는 2011년 이 집을 사들였다. 전 주인은 이 적산가옥에서 태어나 평생을 산 노인이었다. 하역회사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했던 아버지가 1945년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하는 사장에게 받은 집이라 했다. 고집스런 주인이 집을 크게 개조하지 않고 살아왔던 게 백 대표에게는 행운이었다. “3층에 올라갔더니 기울어진 벽에 1920년대 요미우리 신문이 붙어 있고, 일본어 낙서가 가득했어요. 창으로 들어온 빛이 때가 낀 다다미방을 환히 비추는데, ‘아, 이곳은 보존해야 할 곳이구나’ 싶었죠.”

 근대건축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수개월간 복원 작업에 매달렸다. 옛날 자료를 참조해 변형된 외관을 되살리고, 기둥의 찌든 때도 사람 손으로 일일이 닦아냈다. 냉난방 시설이 없는 일본식 집이라 벽채는 단열을 위해 수리해야 했지만, 3층 다락방 등은 구조물이 얼기설기 드러난 모습 그대로 남겨뒀다. 사람들이 공간에 남은 역사의 흔적을 느꼈으면 해서다.

전(前) 주인 평생 살며 보존 … 문화재 지정

“일제시대 건축물은 부끄러운 역사라는 이유로 빠르게 헐려 나갔죠. 하지만 당시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활용하면서 그 시대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팟알’ 외에도 전남 벌교의 ‘보성여관’, 전북 군산의 ‘미즈카페’ 등 일제시대 건축물을 카페나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사례는 점차 늘고 있다. 하지만 ‘팟알’처럼 보존가치가 있는 근대 건축물을 개인이 매입해 복원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 6월 문화재청은 이 건물이 가진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

 카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우리 아버지가 이 하역회사에 다녔다’며 감회에 젖어 둘러보는 할아버지도 있고, 점심시간에 들러 다다미방에서 담소를 나누는 회사원들도 있다. 카페 한켠에 전시된 인천의 옛 풍경사진으로 만든 엽서도 인기다. 백 대표는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옛 건물이 가진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낡은 건물을 무작정 부술 것이 아니라 잘 남겨 활용하면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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