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봉 고 엄민영씨 영전에-백남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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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회자정리와 유시유종의 천도를 어이 피할 수 있을까마는 슬프다-한창일합 연부역강한 나이에 엄형이 가셨군요. 겨레는 또 하나의 일꾼을 잃었고 우리는 모든 것을 주고받던 외우를 잃었소. 한결같이 염원하던 조국의 안정이 이제 가다듬어져 가는 시기에-.
10여년전 며칠씩 침식을 잃고 번역을 한다기에 『죽고 싶으냐』고 책과 원고지를 내던졌을 때 『자네보다 하루를 더 살아도 더 살테니 걱정 말라』던 얘기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며칠전 입원을 했단 얘기야 들었지만 며칠씩 밤을 세우고도 끄떡없던 강인한 몸인지라 곧 회복될 것을 바랐더니…. 이 무슨 비보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구고보에 입학한 14세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길을 걸은지 40여년. 고인은 생전에 끊임없는 자극으로 많은 사람을 이끌어 주었고 강인한 투지로 본을 보였습니다.
이제, 슬픔과 당혹속에 벗과 제자들을 남기고 홀로 향연의 그늘에 감기시는 것인가.
40이 넘어 다닌「뉴요크」대학원에서 재기 발랄한 20대의 각국수재를 제쳐놓고 수석의 영광을 누린 고인의 출중한 재질과 투지도 이제는 차디찬 유택의 영겁에 묻히는 것입니까.
어려울 때면 서로 참고, 같이 걱정하던 치봉을 잃고 우리는 고인의 영전에서 목메어 말을 잃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고난과 질곡의 식민지교육아래서 질식할 것만 같았던 대구고보시절, 조선어와 조선사를 교과목에 넣어달라고 동맹휴학을 주동했다가 같이 퇴학을 당했던 일. 일본구주대학에서 1, 2등을 다루던 일.
4·19후 학계를 떠나 같이 참의원에 입후보하기까지에 나눈 그 많은 얘기들. 나라를 걱정하느라 지샌 그 숱한 밤이 뜨거운 호흡과 못다한하 많은 말을 납기고 치봉은 어찌 눈을 감으셨을까.
학문에 몰두하던 그의 정열은 「뉴요크」대학의 「슈바르츠」교수 같은 외국인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정치인으로, 행정가로, 또 학문하는 사람으로, 치봉은 탁월한 분이었다는 말을 그의 영전 앞에서 하게됐으니 가슴이 메입니다.
정계에 발음 들여 놓은지 10년, 이 나라의 안정과 번형에만 봉사한 고인의 혜안과 냉철한 판단은 이제 뿌리를 내리고 있읍니다. 주일대사로 근무하면서 일본사람 이상으로 일본정계·경제계·학계에 대한 통찰력으로 외교가를 늘리게 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원숙한 풍모는 우리의 뺄 수 없는 긍지가 아니 었읍니까. 그러기에 더한 이 설움! 붓을 다해도 못 다쓸 애통과 아쉬움입니다.
어려서부터 남보다 하나라도 더 하겠다는 집념을 불태워 몸을 깎아 나라와 주변에 남보다 많은 것을 바치고 남긴 치봉.
이제 통곡 속에 마르는 한잔 술로 생전에 못다 한 깊은 정을 새롭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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