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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속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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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경제부문 차장

인간에게 인간의 속성이 있듯이 돈에는 ‘돈의 속성’이 있다.

 최근 들은 돈의 속성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국제금융 권위자인 미국 프린스턴대 신현송 교수 얘기다. 신 교수는 신흥국들이 경제위기 때 외국자금 이탈을 막으려고 금리를 올리자는 주장을 물정 모르는 소리로 평가했다. 호황 때는 금리를 올리면 자금이 들어오지만, 위기 때 금리를 올리면 되레 자금이 더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위기가 오면 경제 형편이 어려워진다. 이때 금리를 올리면 기업과 금융기관 사정은 더 나빠지고, 외국자금은 이걸 보고 더 떠나간다는 것이다. 지독한 변덕이다. 이자 한 푼이라도 더 취하려고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듯하다가 막상 불이 붙으면 웃돈이 무슨 소용이냐며 일단 튀고 본다. 1997년 말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은 달러를 붙잡아야 한다며 콜금리를 30% 이상 올리라고 강요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한국 경제를 질식시켰던 IMF의 고금리 처방은 돈의 속성을 잘못 짚은 데서 나온 틀린 처방이었던 것이다.

 돈은 대개 노출과 추적을 싫어한다. 숨는 데는 도사다. 세무조사는 이런 속성과 싸운다. 세무조사로 세금을 더 걷을 수 있을 것 같지만 한계가 있다. 훨씬 많은 돈이 더 교묘하게 지하로 자취를 감춘다. 이미 올 들어 5만원권 수요는 가파르게 늘었는데, 한국은행에 되돌아오는 돈은 눈에 띄게 줄었다. 금융권에선 자산가들이 재산을 5만원권으로 바꿔 비축해 두고 있다는 얘기가 많다.

 지금도 세금이 안 걷혀서 걱정이지만, 역대 세수 부족 근심이 가장 컸던 때는 외환위기 직후였다. 98년 경제성장률은 -5.7%로 곤두박질했다. 부도기업이 속출해 세금 거둘 대상이 마땅찮을 정도였다. 그때 세금 가뭄 해결의 일등 공신이 등장했다. 신용카드 소득공제 제도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세금을 덜 낼 수 있다고 하니 너도나도 신용카드를 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음성소득이 노출돼 세수로 연결됐다. 숨은 돈을 햇볕 아래로 끌어낸 것은 몽둥이가 아니라 돈이었던 것이다.

 돈은 불확실성을 못 참는다. 뻔히 보이는데 손해를 입는 것을 경멸한다. 정부가 부동산 세금 인하 발표를 내놓아도 실제 세금이 내리기 전까지 거래가 실종되는 이유다. 이번에도 기획재정부가 안전행정부·국토교통부와 합동으로 취득세를 내리겠다고 발표하자 주택 시장에선 거래절벽이 생겨나고 있다. 취득세 인하는 국회에서 법이 고쳐져야 가능한 사안이다. 하지만 세금이 얼마나 줄어들지, 언제 통과될지, 과연 통과되기는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세금을 내리겠다는데 당장 거액을 들여 집을 사기도 주저된다. 거래가 사라지면 돈이 멈추고 경기는 얼어붙는다.

 박근혜정부가 추구하는 고용률 70%와 창조경제를 통한 경제부흥은 결국 돈과 직결돼 있다. 돈이 잘 돌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자면 돈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한다. 현오석 경제팀이 돈의 속성에 보다 정통했으면 좋겠다.

이상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