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연극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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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 친환경 농산물로 만든 음식을 내놓는 식당이 있다. 배추김치도, 나물도, 된장국도 '심심' 그 자체다. 자극적인 맛으로 길들여진 입에 그것은 고역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릇 속 음식이 비어갈수록 드는 생각, '아, 담백하고 맛있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오른 연극 '집'은 음식으로 치자면 무공해 농산물로 지은 된장국 같다. 자극적인 이야기와 영상에 길들여진 요즘 사람들에게 '가족'이라는 담담한 주제는 밋밋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갈등과 화해를 거치며 가족 간에 빚어지는 사랑은 여운이 깊다.

답십리 골목의 13평짜리 반지하 집. 이 집엔 15년간 시(詩)만 써온 아버지와 화투판을 벌여 용돈을 챙기는 어머니, 남편에게 얻어맞고 도망온 누나, 찜질기 배달원인 동생 철수가 산다.

누나를 데리러온 매형은 아예 집에 눌러앉고 철수가 하룻밤 실수로 처녀를 임신시키면서 가정의 평온은 깨진다. 결혼식 준비를 하면서 가족들 사이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가족들은 하나둘 해법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연극 '집'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대사나 사건들이 우리 집 또는 이웃집을 보는 것처럼 친숙하다. 그 친숙함이 자칫 지루함으로 전락할 수도 있겠지만 중간중간 던져주는 재미있는 상황이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안방.거실.작은방으로 이어지는 무대 위의 집은 8도 정도 기울어져 불안하고 결핍된 서민의 삶을 대변한다. 세 개의 방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방에만 조명이 비춰지고 조명을 받지 않는 방에서는 배우들이 마임을 보여준다. 결국 세 개의 공간은 동시에 메시지를 던져주며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건달 사위 역을 맡은 서상원의 능글맞은 코믹 연기도 물이 올랐고 화투를 치는 아주머니들의 수다도 유쾌하다.

늦겨울 퇴근길 버스에서 내린 나의 시린 발이 어김없이 향하는 곳, 작지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 내가 있고 가족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집이다. 하지만 우리는 집의 소중함을 잊고 산다. 연극 '집'이 전하는 메시지는 여기서 출발한다. 23일까지. 02-2274-3507.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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