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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중이 또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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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승희
워싱턴 총국장

전전 정부 때의 얘기다.

 미국 버지니아텍에서 대학생 조승희씨가 총기를 난사했다. 32명이 죽고 29명이 부상했다. 조씨는 미국 영주권자였다. 청와대에선 회의가 열렸다. 수십 명의 미국인을 한국 국적 영주권자가 죽인 만큼 대통령이 미국 정부와 시민에게 사과를 표명할지 여부를 논하는 회의였다. 다행히도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주미 한국대사가 미 정부 측에 사과가 담긴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사과를 받는 미 국무부 측은 의아해했다. 미국에 사는 개인이 벌인 사건에 대해 왜 한국 정부가 사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비슷한 경우가 있다. LPGA 골프 선수인 미셸 위와 크리스티나 김은 미국인이다. 미국과 유럽 간 대항전인 숄하임컵에 출전하는 선수들이다. 하지만 경기를 중계하는 한국의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이들을 “우리 선수”라며 한국 낭자군에 포함시킨다. 정서가 국적을 앞선 결과다.

 윤창중 성추행 의혹사건을 다루는 현 정부의 태도는 정반대다. 철저히 수사하라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를 미 정부에 전달하고는 그만이다. 이번에도 미 국무부 인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얼마 전 만난 국무부 인사는 “왜 한국 정부가 윤씨에 대한 외교면책 특권을 요청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상회담 수행단의 일원인 만큼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CNN은 지난달 윤씨 사건을 보도하면서 ‘한국 대변인(Korean spokesman)’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청와대 대변인이니 한국 대변인이라고 한 거다. 이 사건이 기소되고, 만일 미국 법정에서 재판이 열리면 ‘한국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이 되는 셈이다.

미국 법률전문가들은 경범죄(misdemeanor)로 신고된 청와대 전 대변인에 대한 사법처리권을 스스로 포기한 한국 정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게 전례가 되면 앞으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아도 정상회담을 수행한 한국의 장관이나 수석을 보호할 수 없게 된다”면서.

 국민 정서를 의식한 정부가 서둘러 발을 뺀 결과다.

 윤창중 사건의 2막이 오르려 하고 있다. 워싱턴 경찰은 이달 말께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검찰의 법률 검토를 거쳐 기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다시 워싱턴은 술렁이고 있다. 미국은 재판의 나라다. 지난 주말 뉴스전문채널 CNN은 인종갈등을 다룬 ‘지머먼 사건’의 재판을 하루 종일 생중계했다. 부인이 남편을 살해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재판도 생중계됐다. ‘한국 대변인’인 윤씨 사건이 도마에 오르면 자칫 한국의 음주 문화와 성추행 문화가 전파를 탈지도 모른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죄도 밉고 사람도 밉다. 하지만 이런 사건에 대한민국의 격(格)을 걸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윤씨가 “문화의 차이”니 어쩌니 하면서 변명하는 모습을 워싱턴에서까지 보고 싶진 않다.

박승희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