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이슈] 동료 손잡고 바다로…산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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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부장님. 여기는 백령도예요. 누구와 함께 있냐고요. 부장님이 잘 아는 우리 부서원이에요. 놀라셨죠…."

SK㈜ 법무팀 구창용 과장은 지난해 말 같은 부서 동료와 백령도에 다녀 왔다. 금요일 저녁에 '벼락치기 여행'을 제의해 토요일 새벽 가방을 꾸렸다.

구 과장이 여행을 가자고 한 배경에는 속셈이 따로 있었다. 업무를 둘러싸고 티격 태격했던 동료와 살갑게 지내기 위해서다.

갈등을 빚었던 두 사람은 섬 주변을 둘러 보고 저녁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술자리는 여관방으로 이어졌고 새벽까지 통음을 하며 속내를 활짝 열었다.

구 과장은 "토요일 떠나 일요일에 돌아 오는 스케줄이었는데 일요일 아침에 갑자기 안개가 끼는 바람에 배편이 끊겨 동료와 하루 더 지냈다"며 "서로 오해를 말끔히 씻어 낼 수 있었고 이제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됐다"고 말했다. 월요일 오후 늦게 회사에 출근했지만 부장도 이해하는 눈치였단다.

구 과장은 최근 2년 동안 주말을 활용해 동료나 가족과 여행을 자주 한다. 그는 지난해 사이판과 피지에 갔다가 월요일 새벽 김포에 도착해 출근한 적도 있다.

그는 이달 초 아내가 맏며느리로서 설 준비를 하느라 고생했다며 손을 잡고 강화도에 다녀왔다. 회사가 휴무일로 정한 결혼기념일에는 주변 눈치 안보고 여행가방을 멘다.

구 과장은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자신을 뒤돌아 볼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인적이 드문 여행지에서 혼자 걷다 보면 그렇게 사람이 그리울 수 없습니다. 또 그럴 때는 미워했던 사람이라도 있으면 말벗이라도 할 수 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생기지요"라며 회사나 집안에서의 갈등은 여행으로 푼다고 했다.

기업에 주 5일제 근무가 확산되면서 직장 생활에서 쌓인 갈등과 묵은 때를 털어 버리려고 동료나 가족끼리 가벼운 여행을 떠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현대석유화학 원료팀 허광식 과장은 뜻이 맞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지난 8일 강원도로 스키여행을 다녀 왔다.

허 과장은 "IMF 외환위기 이후 회사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최근 몇년 동안 구조조정 바람에 휩쓸리며 살았어요. 그런데 이번에 동료들과 바깥바람을 쐬니 한결 심신이 가벼워졌다"며 "가족도 함께 갔더니 모처럼 가장 노릇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빚이 많은 현대석유화학은 LG화학-호남석유화학 컨소시엄에 경영권을 넘기는 본계약 체결만 남겨둔 상태여서 회사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다.

회사 살림이 빠듯해져 팀원끼리 제대로 회식을 할 수 없었고 일부는 제 할 일만 하고 바로 퇴근해 버려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차츰 없어졌다.

특히 회사가 팔린다니 앞으로 직장생활은 어떻게 할지 걱정이 앞선다.

허 과장이 '2박3일 스키여행'이란 기습카드를 꺼낸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직원 12명이 이에 호응하자 허 과장 스스로도 놀랐다고 한다.

스키 여행팀은 설원을 누비고 콘도에서 수영과 사우나를 하면서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를 씻어냈다.

허 과장은 "회사 주인이 바뀐다는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숨이 막힐 지경이지요. 이제 막 입사한 새내기 후배에게 따뜻한 이야기를 제대로 못해줬는데 이번 스키여행으로 다소 마음의 부담을 덜어냈습니다"라고 말했다.

현대석유화학은 구조조정하느라 대기업 가운데는 늦은 편인 지난해 말부터 격주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세브란스정신건강병원 이홍식 교수는 "회사 동료나 가족과의 여행은 상호간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는 기회가 되고 즐거움을 나눌 수 있어 심신 회복에 도움이 된다"며 "직장과 거리를 두는 것도 스트레스를 이기는 저항력을 높여 준다"고 말했다.

고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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