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직후 '손볼 사람' 추려 삼청교육대式 얼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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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자로부터 억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10일 구속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강정현 기자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국가정보원(국정원) 개혁과 관련, 자체 개혁에 손을 들어줬다. 이에 대해 원세훈 전 원장 시절을 겪은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은 내부 개혁 성공의 관건은 ‘원장 권력의 견제’라고 입을 모은다. 원 전 원장 시절에 대한 이들의 말을 종합해본다.

2009년 촛불 사태 이후 원세훈 국정원장이 취임한 뒤 국정원 간부 A씨는 돌연 국정원 산하 정보대학(현재 정보교육원) 입교를 지시받았다. 가보니 100여 명이 모였는데 인적 구성이 묘했다. 대부분 2~4급 간부들이었고 그중엔 입교 예정자 외에 ‘근무 태만자’ ‘물의 야기자’ ‘특이 동향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있었다. 특이 동향자들은 ‘정치범’이라고도 불렸다. A씨는 “이명박 정권이 손본 사람들”이라며 “노무현 정권과 밀접했던 간부와 특정 지역 출신이 많이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내곡동 안팎에선 이 교육을 ‘국정원 삼청교육대’라고 수군거렸다.

교육 내용도 특이했다. A씨는 포항에서 2주간 해병대 교육을 받았다. 50 가까운 나이, 땡볕 퍼붓는 뻘밭에서 헉헉거리며 다른 고위 간부들과 해병대 고무 보트를 머리에 이고 기었다. 그보다 더 고위직, 더 연로한 간부들에게 모욕적인 일도 벌어졌다고 그는 말한다. 역시 정보대학에 긴급 입교 조치된 B씨는 “공수 훈련도 받았다”고 했다. 개중엔 ‘수양록’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 중 여럿이 이런저런 이유로 내곡동을 떠났다고 했다. A·B씨는 모두 “수치스럽고 모멸감이 든다”며 말을 이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간부교육은 늘 있는 것이며 강도 높은 내용도 포함된다”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해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명박정부 때 국정원 고위 간부였던 K씨는 “정권 교체 뒤 정신교육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교육을 마친 뒤 대부분 현업에 복귀했다”고 말했다.

이 ‘국정원 삼청 교육대’는 ‘당한 이들’에겐 국정원이 내부 정치 보복으로 중립성을 스스로 해치고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낸 단면으로 꼽힌다. 김대중정부 때인 1998년 4월 1일 ‘재택근무’를 명령하는 방식으로 500여 명을 축출한 ‘안전기획부 대학살’을 연상시킨다. 당시 안기부를 나온 직원들은 “경상도 출신 70%가 쫓겨났다”고 말한다. 규모는 다르지만 이명박정부도 김대중·노무현의 소위 ‘진보정부’에 대해 손보기를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위 보수와 진보의 상호 보복이다.

국정원은 원칙적으론 ‘정치 중립’을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삼는다. K씨는 “원 원장은 취임 직후부터 지난 대선에 이르기까지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돼선 안 된다. 정치개입을 하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말했다.

A씨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은 워크숍을 하며 뼈를 깎는 각오를 다지고 혈서까지 썼다”며 “원 원장 취임 직후에도 직원들이 정보학교에서 며칠씩 밤샘 세미나를 하며 정치 중립 각오와 본연의 업무를 다졌었다”고 말했다. 이명박정부의 국정원에서 고위 간부를 지낸 J씨도 “2003년 이후 혁신과 정치중립을 약속하는 많은 회의가 있었고 혈서도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짐이 현실로 이어지진 않았다. 원 원장 취임 직후 ‘삼청 교육대’로 간주되는 조치가 있었고, 이어진 ‘인사 질서 파괴’로 국정원의 정치색은 급속히 짙어졌다. 원 원장은 2~5급 간부들을 대상으로 새로 팀장 제도를 운영했다. 2급 고위 간부가 4~5급 팀장 밑으로 들어가는 일이 꽤 있었다고 한다. A씨는 “국내·해외 부서를 막론하고 참여정부와 가까웠거나 특정 지역 출신 등 ‘찍힌 사람’들이 대상에 많이 들어갔다”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어떤 이들은 1~2년 버텼지만 사표를 던진 이도 많았다”고 말했다.

국정원 출신 C씨는 “전에는 인사위 검증, 3심제, 몇 배수 선정 등을 통해 압축된 명단을 대상으로 간부 인사를 했는데 원 원장은 그러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인사 전횡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징계를 해도 국정원법을 안 따랐다. 해외에서 성매매와 관련된 인사가 있었지만 ‘심복’이란 이유로 봐주고 반면 업무상 실수나 명령 위반 같은 중대하지 않은 경우인데도 가차없이 면직시켜 불만이 많았다”고 주장하며 “이들 중 일부는 소송 중”이라고 말했다. 호남 출신의 국정원 전 간부인 D씨는 “2009년 3월 원장이 들어온 뒤 ‘행정 경험도 없는 민간인이 뭘 하느냐’고 한 말이 어떻게 보고됐는지 빌미가 돼 옷을 벗게 됐다”고 말했다.

E씨도 황당한 일을 겪었다. 노무현정부의 청와대 유력 인사와 친밀했던 그는 어느 날 지인과 저녁을 하던 중 인사 통보를 받았다. 지시에 따라 다음 날 신고 장소인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갔다. 거기엔 이미 전국에서 ‘쫓겨온’ 10여 명의 인사가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좌천을 걱정해 1급이나 차장급 간부 중 제대로 직언하거나 건의하는 것을 못 봤다”며 “1급이 졸지에 제주도 같은 외지로 발령나는 현실을 본 직원들이 상명하복을 생명으로 하는 국정원 체제 아래 어떻게 행동할지 뻔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다른 직원은 “간부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해 국정원의 정치중립이 훼손됐다”고 주장한다.

정권 교체기마다 벌어지는 보복, 바른 말을 하면 인사 조치되는 내부 구조는 직원들을 원장 아래 줄 서게 만들고 정치 중립은 ‘원장의 손’ 아래 들어갈 수 있다.

전·현직 간부들에 따르면 청와대마저 원 원장을 우려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명박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원 원장을 물러나게 하려는 시도가 두 번 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나 워낙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어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K씨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원장에 권한이 집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만의 특성이 아니다. 전 세계 정보기관의 수장도 정치적 이유로 교체된다”며 “과거에 비해 국정원은 달라졌다. 야당을 탄압하거나 정치 판세를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신임을 업은 국정원장이 독주하고 그 아래 간부?직원들이 줄을 서는 내부 구조에서 정치적 중립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공통적인 지적이다. 그래서 전·현직 국정원 일부 간부는 “개혁의 핵심은 원장 권력의 통제”라고 주장한다.

A씨는 “정권 교체 때마다 반성문을 쓰는 것을 많은 국정원 직원들은 부끄러워한다”며 “개혁을 국정원 내부에만 맡기면 안 되고 정치권이 큰 틀을 마련해야 한다. 국정원 내부에도 이를 반기는 목소리가 있다”고 말한다. 핵심은 외부 감시 강화 및 제도화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국정원은 감시권 밖에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의 감시는 제한적·형식적이며 외부 감사도 없고 내부 감사로 끝이다. 감사 결과는 공개되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에서 국정원에 감사를 파견하는 개혁 방안도 거론된다.

민주당 진성준 의원은 같은 당 유인태 의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댓글 문제로 열린 국회 정보위에서 ‘직급이 뭐냐’는 질문에 국정원 간부는 ‘말할 수 없다’고 버텼다”며 “그런 기초적인 것도 말할 수 없다는 국정원이 스스로 알아서 개혁을 한다면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게 유 의원의 말이다.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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