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기금 '문턱' 너무 높았나 … 신청자 두 달 새 90% 급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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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국민행복기금 수혜자 확대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행복기금 신청자가 급감하자 야당과 시민단체는 “신청 기준이 너무 엄격해 제도의 실효성이 없다”며 정부에 수혜 대상 확대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신청자 감소는 일시적이며 다시 늘 것이기 때문에 대상 확대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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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기금은 신청마감 기간인 10월 말까지 신용불량자 32만6000명의 채무를 최대 50%(기초생활수급자 70%)까지 줄여줄 계획이다. 이달 5일 현재 채무조정 신청자는 12만4203명, 이 중 77%인 9만5559명이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이 수치만 보면 아직 신청기간이 4개월 가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예상치를 달성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5월 이후 행복기금 신청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4월 22일 출범한 뒤 행복기금은 순항하는 듯했다. 4월 말까지 열흘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채무조정 신청자가 9만447명으로 하루 1만 명꼴이었다. 신청자가 몰리자 일각에서 재원 부족 우려까지 나왔지만 5월 들어 신청자가 2만4453명으로 대폭 줄었다. 급기야 지난달에는 7301명만 신청해 첫 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러자 “이대로 가면 수혜 대상이 32만 명은 고사하고 15만 명을 넘기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이 야당을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야당은 지난 1일 국회에서 열린 가계부채 청문회에서도 “실질적으로 국민행복기금의 지원을 받는 대상이 애초 예상에 비해 너무 적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민주당 이학영(정무위) 의원은 “정부가 채무자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만 생각해 신청자격을 너무 까다롭게 정한 탓에 정작 도움이 필요한 채무자들이 제도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말했다. 애초에 출발이 잘못됐다는 비판도 있다. 민주당 김기준(정무위) 의원은 “원래 18조원 규모로 국민행복기금을 설치해 322만 명에게 혜택을 주겠다고 공약했지만 실제로는 공약과 비교할 때 자금 조달 규모는 1.6%, 혜택 인원은 10분의 1로 줄었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지금이라도 수혜 대상 확대를 위해 신청자격을 크게 완화해야 한다는 게 야당의 주장이다. 현재 행복기금 신청자격은 ‘올해 2월 말 기준 6개월 이상 빚 연체자(1억원 이하)’다. 이학영 의원은 “행복기금 대상자의 절반 가량이 1000만원 미만의 소액채무자로 도덕적 해이가 없다는 게 확인된 만큼 연체기간을 3개월가량으로 확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6개월 이상, 1억원 이하처럼 기계적으로 자격을 정하니까 문제가 된다”며 “연체기간보다는 자활의지를 평가해 채무를 조정하고 잘 갚는 채무자에게는 감면율을 높여 주는 식으로 탄력적인 운용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위는 수혜대상 확대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달부터 시행 중인 ‘일괄매입’이 효과를 발휘하면 수혜자가 조만간 다시 늘어나 예상치인 32만 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괄매입은 행복기금이 채무자의 의사를 묻기 전에 먼저 부실채권을 은행들로부터 사들인 뒤 채무자에게 채무조정을 제안하는 제도다. 금융위는 은행권의 6개월 이상 연체자 134만 명 중 30% 이상이 일괄매입 채무조정에 응할 것으로 기대한다.

 금융위는 “신청자가 줄었기 때문에 대상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금융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일단 신청자격을 연체기간 3개월로 완화하면 그 다음엔 연체기간 한 달로 줄여야 하는 등 끝이 없을 것”이라며 “채무 불이행자의 부담을 줄여 주는 것만큼이나 모럴해저드를 막는 것도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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