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혈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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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울의 각종 병원들은 요즘 피가 모자라 큰 소동이 벌어지고있다. 서울시내에서 하루에 필요한 혈액은 평균 1백50병 (7만5천cc). 그러나 공급량은 그 3분의1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혈액기갈로 인해 몇몇 유수한 종합병원에선 수술「스케줄」을 바꾸는등 혼란이 일어났다고한다. 당연한 이치이다. 병원과 혈액과의 관계는 인체와 그것과의 관계와 조금도다름없다. 비단수술뿐만아니라, 조혈작용이 중지된 환자에겐 한방울도 아쉬운 생명의 「에센스」 이다.
도대체 매혈제도가 있는 나라는 이 지상에서 몇몇 경우 밖에는 없다. 대개의 나라들은 의료보험제도가 견고하게 이루어져있어서 혈액고갈과 같은 현상은 좀체로 볼 수 없다.
이웃 일본의 경우만해도 혈액예치는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5인 가족당 1인의 건강성인은 연1회이상 동네의 보건소에서 피를 맡겨둔다. 매혈이 아니고 예치인 것이 주목할만 하다.
언제고 피가 필요하면 그 맡겨둔 피를 찾아 쓸수 있는것이다. 가정마다 통장(카드)이 있기때문에 전국 어디에서나 그것만 제시하면 피를 되찾아 쓸수있다. 예금이나 마찬가지로 피의 대출(?)도 가능한것은 물론이다.
일본뿐인가, 미국·영국·「스웨덴」·「덴마크」등 모두 이와 비슷하다. 피를 돈과 바꾸는 나라는 오늘의 문명과 제도로는 야만적 행위나 다름없다. 혈액예치는 하나의 세계적 관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성인의 경우 자기의피를 뽑는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조금도없다. 18세에서 60세까지의 한국성인은 2개월에 1회씩 3백80cc정도는 뽑아도 아무런 지장이없다. 조물주의 섭리는 개개인의 자가발전(?)으로 그정도의 피는 금방 보충을 시켜준다.
혈액은행에선 예치된 피를 섭씨 4도내지 6도로 냉장해 둔다. 이런 상태에선 21일간은 너끈히 보존이 가눙하다. 따라서 각종 병원에선 마치 은행이 자금을 공급하듯 혈액은행에서 피를나누어 쓴다.
이와같은 제도는 시민들사이에 보이지않는 혈맹의식같은것을 불어넣어줄것도같다. 저마다소매의 단추를 꼭꼭 잠그고 살아가는 빈혈사회에선 볼수없는 인간애, 아니 시민애 같은것 말이다. 우리는 좋은 제도를 놓아두고도 쓸줄모르는「에고」시민들인가. 이 무지로 인한 빈혈의 악순환을 언제까지 내버려 둘수는 없다. 따뜻한 심장으로 한번들 생각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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