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과 토론의 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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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문답과 토론은 인간생활의 처음이요, 또 그 전부라고 할 것이다. 특히 정치의 발전은 그 목적과 방법의 탁월한 개척을 전제로 해왔다.
오늘의 민주주의 사상과 대의(대의) 정치제도의 발견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인간개인의 자유의사를 보장할 것과 동시에 사회공동체의 발전과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하는 문답과 토론이 곧 오늘의 민주정치라는 것임은 더 말할것 없을 것이다.
여당에 대한 야당이 있고, 여당과 야당내에 주류파니 비주류파니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그 사회내의 여러가지 견해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 줄 뿐, 공산독재국가들이 비방하듯이 대립내지는 어떤 형태의 투쟁이 반드시 혼란과 무질서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닌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견해의 차이내지는 그 대립이 구제할 수 없는 분열의 파국에까지 미치지 않도록 토론을 하는 거기에 토론의 목적이 있고, 그것이 곧 정치의 목적이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는 대체로 어느 구석에서나 문답과 토론의 목적과 필요조차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여당과 야당은 국민의 견해의 차이를 조정하는 대의기능을 발휘할 나위 없는 대립상태에서 힘과 힘의 육박전을 연상케한다. 소위 주류니, 비주류니 하는 파벌도 당내의 견해차이를 조정하기 보다는 너냐? 나냐?의 소위 힘의 대결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국회는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야당없는 국회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야당이 비록 여당에 비하여 국회내의 의석 수효는 적다하더라도 떳떳이 국민의 여론을 배경으로 정부와 여당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펴고, 비판을 퍼붓는 가운데서 여당과 정부도 뚜렷이 자신의 위치를 밝히며,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거둘 수도 있는 것이다. 이같이하여 여야의 관계는 언제나 대등한 입장에서 국민들의 대표로서 서로 아끼는 사이가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다.

<여야대등한 입장>
만일 오늘과 같이 야당이 여당과 정부로부터 존중되지 않고 있다면 이는 토론의 효과를 무시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따라서 정치의 민주적 바탕을 극히 소홀히 하는 결과가 될 것을 염려치 않을수 없다.
흔히 말하기를 정치는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도 한다. 권력을 잡는 일이 정치의 수단방법이 되고 있음은 더 설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권력을 잡는 일이 결코 정치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권력정치란 무섭고 또 잔인한 것이다. 옛날의 고려시대나 이조시대의 참혹한 당쟁이나 공산독재하의 숙청(숙청)이란 것이 다 문답토론을 무시한 권력쟁탈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여당과 야당, 또 주류와 비주류는 다같이 끊임없는 문답과 토론속에 조화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희생·봉사정신을>
정치라는 것은 그 언행이 정직치 못해서는 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나라와 국민의 번영을 위해서 정치가로 행세하고 정당활동을 한다는 일은 곧 그 자신들이 나라와 국민앞에 희생, 봉사의 정신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정치의 원리가 그렇고 우리들 국민의 기대가 또한 그렇건만 오늘의 대부분의 정치인, 그 정당들은 어떤가.
권력은 무엇을 낚기 위한 것이관데, 권력을 싸고 도는 정계의 흐린 물속에는 음모가 따르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토론의 과제가 될 견해의 차이나 그 대립이란 것은 국가발전을 도모키 위한 그경륜이 주된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나 대개의 경우는 권력을 싸고도는 파벌의 싸움이다. 그때문에 토론보다도 음모가 더 필요한 모양이다.
그러나 음모의 흐름은 대개 음모로써 망하는 것이 통례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음모에는 정의경륜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고, 사라사욕을 위한 거짓이 그 바탕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와 정치가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국민의 보이지 않는 비판의 화살앞에 서야한다. 두려운 것은 국민의 비판과 역사의 심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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