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철강 매각 무슨 교훈 남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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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이 부도가 났다. 그로부터 만 6년이 흐른 오늘. 한보는 이제야 주인을 찾았다. 더 높은 값에 더 일찍 주인을 찾을 수도 있었으나, 빙빙 돌아오는 통에 몸값은 왕창 떨어졌다. 2조원에도 안 팔겠다던 회사를 결국 5천억원도 못 받고 판 셈이다.

"물건을 팔면서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당진공장 설비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보철강 매각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한보는 한국기업 매각사(史)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며 "어느 누구 하나 책임지고 새 주인을 찾아줘야겠다는 사람이 없었던 결과"라고 말했다.

◇2조원에 팔 수도 있었는데=한보철강 매각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던 그해 8월 포철.동국제강은 한보를 자산인수 방식으로 인수하겠다며 2조원을 제시했다.

그러나 채권단은 회계법인의 자산평가 등을 토대로 3조원 이상은 받아야 한다며 거부했다. 당진공장을 세우는데 부지값(약 3천억원)과 A지구(약 1조1천5백억원)와 B지구(3조4천여억원) 등 모두 4조9천여억원이 들었다.

포철 관계자는 "당시 채권단은 시간이 흐를수록 물건 값은 깎인다는 평범한 진리를 간과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금 납입조건 못 맞춰 실패=한보 채권을 자산관리공사(캠코)가 사서 매각 주체가 된 2000년 5월.

4억8천만달러(약 6천억원)에 한보를 사겠다며 본계약까지 체결했던 미국 네이버스 컨소시엄의 아이젠버그 회장이 한국을 찾았다.

그는 경제부처 장관 등을 만나 한보 운영 방안 등을 의논하려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일정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는 정부 최고위층으로는 산업자원부 차관을 만났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9월 말 네이버스는 인수 대금을 납입하지 않았다. 이유는 대금납입 선행조건(조세채권 할인.설비공급자 동의 등)을 캠코측이 1백%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네이버스측을 대리했던 한 관계자는 "네이버스가 꼼짝없이 돈을 넣도록 하기 위해선 선행조건을 충족시켰어야 했으나 9월 중순까지 정부 내 어느 누구도 뛰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캠코측은 네이버스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겠다고 했지만 이후에 국제소송은 생기지 않았다.

◇진통 끝에 AK캐피털 품으로=캠코는 지난해 3월 중후산업 권호성 사장이 이끄는 AK캐피털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실사 과정에서 가격과 발전소 부지 매각 여부 등의 문제로 계약이 파기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지난해 말 3억7천7백만달러에 팔기로 합의했으나 막판에 법원이 틀었다. 계약이행 보증금 1천만달러가 적으니 올리라는 것. 결국 2백억원을 추가로 내기로 했다.

그러나 매각절차가 완전히 끝난 것(클로징)은 아니다. 우선 AK측은 앞으로 1백50일 이내에 잔금을 내야 한다. 캠코측도 조세채권(한보가 그동안 내지 못한 세금) 문제 등을 해결한 뒤 채권단회의와 법원의 정리계획 인가를 받아야 한다.

이번에는 클로징을 못할 가능성이 매우 작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실패하면 AK는 3백30억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날리며, 채권단도 또다시 지루한 매각협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AK측은 미국 버밍햄 스틸 및 뉴코어 출신 거스 힐러를 최고경영자로 내정했다.

◇남긴 교훈=질질 끌어서는 값이 오를 수 없다는 것을 한보는 확실히 보여줬다. M&A 전문 모 변호사는 "늦게 팔려 값을 더 받은 경우는 2년 전에 매각된 K건설이 유일할 것"이라며 "정부든 채권단이든 왜 빨리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매입자(바이어)에게 불리한 M&A 관련 법과 제도도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매입자가 대금을 지불한 뒤에도 2주일 이내에 채권단이 '마음에 안 들면' 뒤집을 수 있도록 돼 있는 제도도 고쳐서 매입자가 갖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줄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또 팔리면 '국부 유출'로, 안 팔리면 '협상력 부재'로 협상팀을 몰아붙이는 분위기도 바뀌어야 한다.

김동섭.이영렬 기자

<한보철강 매각일지>

▶97.1 한보철강 부도

▶97.4 채권단, 제3자 매각결의

▶97.8 포철.동국제강, 인수의향서 냈으나 무산

▶97.8 회사정리절차 개시 결정

▶98.4 채권단, 국제입찰 결정

▶99.7 회사정리계획 법원 인가, 법정관리 시작

▶99.8 미 네이버스 컨소시엄과 MOU 체결

▶2000.3 네이버스와 매각 본계약 체결

▶2000.9 계약 이행조건 불충족 및 네이버스 대금납입 거부

▶2000.10 네이버스 계약 해지, 채권단 매각 재추진 결의

▶2001.12 AK캐피털을 조건부 낙찰자로 선정

▶2002.3 AK캐피털과 MOU 체결

▶2002.11 AK캐피털과 매각 가격 합의

▶2003.2 AK캐피털과 본계약 체결

▶(예상)2003.7 AK캐피털 대금 납입 및 법원 인가

<사진설명>
한보철강 매각을 위한 본계약서 서명식이 12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 강당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나석환 한보철강 사장, 연원영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 권호성 AK 캐피털 대표, 거스 힐러 전 버밍엄스틸 사장. [김상선 기자<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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