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발언 내용도 모두 밝혀지면 … 청와대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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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는지를 놓고 여야 모두 표면적으론 전문 공개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숨은 변수는 남북관계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발언록과 함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발언 내용이 공개될 경우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있는 남북관계에 격랑이 몰아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남북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 내용이 공개되고 이에 북한이 반발할 경우 부담은 고스란히 청와대가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른바 ‘청와대 딜레마’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 대변인은 23일 새누리당의 발언록 공개 압박에 대해 “전문 공개는 우리도 원치 않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정상회담 당시 녹취 테이프와 일부 녹취가 선명치 않아 조명균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이 수기(手記)로 작성했던 남북 정상의 대화 내용을 모두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7년 10월 3일 정상회담 때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 이재정 통일부 장관 등 고위 당국자 외에 조 비서관이 뒷자리에 배석해 주요 대화를 기록한 것은 물론 디지털 녹음기로 회담 내용 전체를 녹취했는데, 이 내용까지 모두 공개하자는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체제와 최고 존엄에 대해선 절대 양보하지 않았던 북한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발언이 공개되면 전면공세로 나올 게 뻔하다”며 “북한이 박근혜정부의 신뢰 프로세스 자체를 부정하고 나설 경우 대화록 공개의 파장이 현 정부로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최고지도자에 대해 극히 민감해 하는 북한은 대화록 공개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뒤를 이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현 정부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상회담 발언록은 남북 양쪽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 있다. 대화 내용에 보수층의 공분을 일으킬 만한 한·미 동맹, 주한미군 철수, 북한 핵개발 등의 대목이 담겨 있을 경우 한국 사회 내부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의 대북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재연될 수 있다. 손광주 데일리NK 통일전략연구소장은 “진보 정부에서 추진했던 대북 정책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라며 “진통은 오겠지만 대화록은 공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대북 전문가는 “NLL을 둘러싼 남남 갈등에 북한의 최고 존엄이 끼어 있는 양상으로, 북한도 대화록 공개의 진행상황을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부담설에 대해 정부의 핵심 외교안보 당국자는 “(대화록 공개는) 국회와 여야가 판단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새누리당 핵심 당직자는 “전문 공개는 청와대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사안인 만큼 이런 점을 계산한 민주당이 국정원 국정조사를 얻어내기 위해 전면 공개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라고 의심했다. 새누리당에선 민주당이 전문 공개 과정을 ‘대통령 기록물에 따른 절차’로 규정하고 나선 것도 ‘정치적 복선’으로 본다. 대통령 기록물은 국회의원 재적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열람이 가능한데, 이 같은 절차를 밟으면 지난 20일 ‘공공기록물’로 간주해 대화록 축약본을 열람한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은 법을 위반한 게 된다.

  채병건·이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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