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줄 묻힌 고향 지키다 포로 된 것이 죄입니까 조국이여, 응답해주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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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24세의 청년이던 권모씨는 총을 들고 전쟁터로 달려갔다. 울면서 배웅하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뒤로 한 채였다. 잠시 집을 비운 아버지와는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이게 가족들과의 생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이후 권씨는 북측의 전쟁포로가 됐다. 그리고 77세의 백발 노인이 된 2003년, 지팡이에 의지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었다. 남측에 형제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곤 피부병 치료를 핑계로 감시를 피해 중국의 모처에 몸을 숨긴 채 동생들을 기다리며 편지를 썼다.

 “내 동생들이 다 살아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뜻밖의 소식을 듣고 사선을 넘고 넘으며 헤어진 지 53년 만에 이렇게 찾아왔다. 함경북도 단천에서 일주일 동안 기차 멀미하면서 막대기를 짚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남의 나라 땅에까지 왔는지 모를 게다. 나는 언제나 내 소원은 통일이고 형제들을 만나는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다.”

 권씨는 가족들과 만나지 못한 애절한 사연을 편지에 남겼다. 그는 동생들에게 “내 말을 명심하라. 너희들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설 수 없으며 여기서 기다리다가 목숨이 지는 한이 있어도 꼭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겠다”고 했다. 또 “항상 (북녘의) 자식들에게 강조하는 건 만약 통일을 못 보고 동생들을 못 보고 죽으면 죽어서도 조국 통일의 그날을 그릴 수 있도록 남반부가 훤히 내다보이는 밝은 산에 묻어달라는 것”이라고 썼다. 살아 있다면 올해 87세가 됐을 권씨는 현재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53년7월 27일)의 총성이 멈춘 지 올해로 60주년이다. 정전 60주년이 됐지만 여전히 북녘 땅에는 권씨처럼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죽어가는 국군포로가 500명이 넘는다. 본지가 20일 박선영(전 선진당 의원) 동국대 법대 교수를 통해 입수한 국군포로들의 편지 41통에는 애끓는 사연들이 가득했다.

 국군포로 배모(80대 중반 추정)씨는 2000년 아내와 동생에게 편지를 띄웠다. “내 가슴속에는 피멍이 들대로 들었소. 혼자 살면서 자식들 키우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가를 생각할 때 볼 면목이 없소. 여보, 나를 많이 욕하시오. 비록 다른 노친(부인·2000년 사망)과 살았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당신 생각뿐이었소.” 편지엔 힘겨운 북한 생활도 녹아 있다. “함경북도 탄광에서 20년이 넘도록 석탄을 캐며 있는 힘껏 일했지만 국군포로라는 딱지가 붙다 보니 아무리 열성스레 일을 잘해도 알아주질 않고 남조선에 형제들이 있다고 하여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부터 감시 대상이 되었다”고 고충을 호소했다. 배씨는 2009년 이후 남측과 소식이 끊겨 생존이 불투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국군포로 권모(85)씨는 2006년 대한민국 정부 앞으로 호소 편지를 띄웠다. 6사단 통신병으로 복무하다 북에 포로가 됐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반세기 넘는 기간 저를 의지하게 한 것은 그리운 고향과 부모형제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희망”이라면서 “나의 탯줄이 묻힌 고향 땅을 지키다 포로가 된 것이 죄가 되었다면 한 편의 글이라도 보내주십시오”라고 조국에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박 교수는 “국군포로 문제를 국방부 군사비밀로 분류해 군사비밀 통제처에서 주관하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며 “지금도 북한에서 한국전쟁 때 실종된 유해를 발굴해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는 미국 사례를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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