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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사건과 대선 불복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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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국가정보원의 인터넷 댓글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된 후 일부에서 ‘대선 불복론’이 나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사퇴론까지 제기된다. 한 유명 인사가 트위터에 “권력찬탈이다. 사퇴해야 한다”고 공언했는가 하면 미국의 한 한인단체는 “박근혜정부는 총사퇴하고 민주당은 대선 무효를 선언하라”고 주장했다. 대선 불복론은 올 초 인터넷 공간에서 대선 결과의 재검표를 요구하며 한동안 이어졌다.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당시 중앙선관위가 국회에서 개표 과정을 시연하는 행사까지 가졌다. 이번엔 전직 국정원장·서울지방경찰청장이 불구속 기소되며 대선 불복론의 불씨를 살린 셈이다.

 물론 댓글 수준이건 뭐건 국가 안보를 지킬 국정원이 선거 여론전에 뛰어들었다는 것 자체는 상식을 가진 국민들 입장에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안보를 책임지는 국정원이 직원을 동원해 댓글이나 달고 있었다는 건 한심한 얘기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기다려야 하지만 국정원의 선거 여론 개입은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재발돼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이게 대선 불복론으로 확산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된다. 대한민국 정치의 고질병인 ‘불복의 정치’ ‘분노의 문화’를 강화하는 정치 후퇴가 되어 버린다. 한국 정치의 근본적 한계는 여건 야건 경쟁자의 존재와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 피아 구분의 이분법을 구사해 왔다는 데 있다. 이분법의 동력을 만들기 위해 때로는 지역감정, 때로는 이념대결 같은 정서적 소재가 공공연히 동원됐다. 이번에도 국정원 사건이 내가 지지하지 않았던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노를 포장하는 명분으로 활용되는 것은 아닌지, 야권은 이런 심리를 은근히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 댓글과 경찰의 중간 수사 발표가 대선 결과를 뒤집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대통령이 바뀐다 해도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새 대통령을 인정할까. 미안하지만 분노는 역풍을 맞고 망하기도 한다.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 기대’ 발언이 선거 개입이라며 분노했던 한나라당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가 망했다. 불과 한 달 만인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152석의 거대 여당으로 만들어 줬다.

 대선 불복론은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대선 불복론이 앞으로 5년마다 소재만 바꿔가며 통과의례처럼 재발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비록 소수라 해도 대선 불복론이 분노를 참지 못한, 진 쪽의 한풀이 마당처럼 관행화된다면 이건 정권교체의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시계를 한참 뒤로 돌리는 일이다. 현 정부가 국정원 사건의 재발을 막을 책임이 있다면 야권은 일부 강성 지지층의 반발을 감수해서라도 정치 후퇴를 막을 책임이 있다. 대한민국이 분노로 움직이는 시대는 지났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