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백93자의 이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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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민족정신이 문제될때마다 연상되는 두개의 얘기가있다.
한 영국부인이 기선을 타고「라인」강을 항행하고있었다. 『당신은 외국인으로서 우리나라의 도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독일인이 물었다. 그 부인은 대답하기를『나는 외국인이 아닙니다. 나는 영국인입니다.』
온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가장많이 읽히고 있는 소설『사랑의 학교』에 이런「에피소드」가 들어있다. 배안에서 가난한 차림새의「이탈리아」소년을 불쌍히 여긴외국인선객들이 푸짐하게「팁」을 준다. 그러고는 소년이「이탈리아」인인지를아는지 모르는지 그선객들이「이탈리아」의 욕을 늘어놓는다. 이것을 엿듣던 그 소년은「팁」을 보기좋게 그자리에서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 두 얘기는 모두 부러울정도로 감동적인 민족적인 긍지와 애국심의 발로를 말해주고있다. 궁금한것은 무엇이그영국부인이나「이탈리아」소년으로하여금 그와 같은 자랑스러운 마음의 자세를 갖게 만들었겠느냐 하는것이다.
물론 하나는 실화이며, 또 하나는「픽션」이다. 그러나 두개가 똑같은 말을 해주고있는 것에는 틀림이없다.
26일 국회는 정부가 제안한 국민교육헌장을 통과시켰다. 전문교수 26명, 48명의 저명인사들에의하여 그동안 5개월에 걸쳤던 벅찬 작업이 이제 끝막음을 본셈이다.
국민교육의 기본적인 지침으로서, 헌장은 마땅히 있어야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기본정신을 정립시켜내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스럽게 여겨지는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두려워지는것은 교육헌장이 또 하나의 구호로 그치고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일제시대의 이른바 교육칙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그 문안이 너무나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 내용 자체는 공허해지기쉬운것이다.
헌장전문이 일반국민에게 보급되기에는 좀 까다롭고 또 문장이 길다고 보는 사람도있다.
개인의 기본적인권에대한 언급이없다고 보는사람도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3백93자 속에 담긴 이념을 일상화시킬수 있는길은 그저 헌장을 외는데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사랑의 학교』와 같은 책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이「라인」강상의 영국부인으로 하여금 영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만들었는가 살펴볼필요도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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