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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후진성의 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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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경제부문 차장

금융회사는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초봉도 많고, 한 20년 근무하면 너끈히 억대 연봉을 받는 곳이 수두룩하다. 물론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은행·증권·보험사는 엘리트 대졸자들의 집결지가 됐다.

 하지만 한국 금융의 실상은 어떤가. 한국 경제를 이끌기보다 골칫거리가 됐다. 나라 전체의 국가경쟁력은 19위지만 금융 경쟁력은 71위다(2012년 세계경제포럼 144개국 조사). 제조업에선 삼성전자·현대차 등 글로벌 일류가 제법 나왔지만 금융에선 국제금융계에 내놓을 만한 대표 선수가 없다. 해외에서 돈을 못 버니 금융사들은 국내에서 독과점 지위를 십분 활용한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다.

 한국 금융이 이 지경이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딱 하나만 지목하라면 나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꼽겠다. 그 뿌리는 잘못된 인사 시스템과 직결돼 있다. 얼마 전 감사원이 감사 결과를 발표한 우리금융지주가 좋은 사례다.

 감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금융지주는 임원을 뽑을 계획이 없던 계열사 우리PE에 A씨를 채용하도록 추천·통보했다. 이팔성 회장과 A씨 간 개인적인 친분이 이유였다. 그 뒤 A씨는 우리PE의 이사대우로 채용됐고, 이후 대표이사에까지 올랐다. 이게 다가 아니다. A씨는 B씨를 우리PE의 관계회사 대표이사로 선임되게 했는데, B씨는 우리금융 재직 시 부실경영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인물이었다. 낙하산 인사가 다시 낙하산을 내려보낸 셈이다. 이 인사 전횡의 중심에는 이팔성 회장이 있다. 이 회장은 우리금융의 주인도, 대주주도 아니다. 단지 이명박(MB)정부 내내 대표적인 금융권 ‘MB맨’이었다.

 기업에선 최고경영자(CEO)가 인사 전횡을 하면 막장 드라마가 펼쳐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예컨대 이렇다. 어느 날 예상도 못한 인사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목격하면 우선 직원들이 달라진다. 일은 뒷전이고 너도나도 ‘연줄’과 ‘백’에 매달린다. 낙하산 인사가 부하 직원들을 독려할 자신감이 있을 리 없다. 실적은 곤두박질한다. 속이 켕기는 CEO는 그래도 성과급을 푼다. 직원들 환심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금융엔 외환위기 이후 12조8000억원의 공적자금이 지원됐다. 국내 금융지주사 가운데 덩치는 첫 번째가 됐지만 수익성이나 자산건전성은 꼴찌를 다툰다. 이런 현실이 막장 드라마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금융감독 당국은 우리금융에서 이런 인사 파행이 벌어지는 것을 과연 몰랐을까. 금융권은 인사 얘기가 총알보다 빨리 퍼지는 곳이다. 게다가 공적자금 투입 기관의 웬만한 인사는 금융위원회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어디 금융위뿐이랴. 공공부문 인사를 총괄하는 청와대 인사 라인은 이런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을까. 금융위나 청와대나 몰랐으면 감독 실패, 알았으면 인사 전횡 묵인·방조다. 그 결과가 한국 금융의 후진성이다. 이게 바로 금융기관장 자리를 정권의 전리품으로 삼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이상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