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의 축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토요일 밤 폴란드에 패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시간, 브루스 아레나 미국 대표팀 감독은 매리어트 호텔 30층에서 내 맞은 편에 자리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멋진 언덕과 서울의 초고층 빌딩도 아레나 감독의 머리속에서 미국팀의 졸전을 지우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월요일 멕시코를 상대로 펼쳐질 미국의 16강전을 고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아레나 감독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많은 스포츠에서 당신은 역경을 보아왔다. 때로는 중요하지 않은 경기를 놓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역경속에서 다시 팀을 정비하고 의미있는 다음 경기를 준비할 수 있는냐의 여부에 있다." 또 그는 "폴란드전 패배는 우리가 경기를 잘 풀어가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멕시코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일종의 경계 신호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8강에 들것이다. 누가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졸전으로 하락된 우리팀의 평가는 72시간 뒤에 바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3일후 멕시코전 후반에서 에디 루이스가 완벽한 크로스 패스를 날리자 미국팀에 대한 평가는 확실히 반전됐다. 랜던 도노반은 마지막 골을 터트리며 월요일 미국의 역사적인 2-0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그 순간, 4명의 새로운 스타팅 멤버 기용과 2000년 11월 바베이도스전 승리 이후 처음으로 시도한 스리백 시스템을 적용한 아레나 감독은 하비에르 아기레 멕시코 감독을 압도하는 전술의 명수로 다시 태어났다.

중앙 미드필더에서 오른쪽 윙으로 자리를 옮긴 클라우디오 레이나는 "멕시코전은 지금까지 우리가 치뤄온 경기 중 가장 화끈한 경기로 몇몇 새로운 스타팅 멤버들이 잘해줬다"며 "어떤 변화도 주지 않은 멕시코에게 아마도 우리의 변화는 불리한 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이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실제로 아레나 감독은 지난 토요일 나에게 폴란드전과 마찬가지로 출전 선수에 변화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본심을 속이며 말한 바 있다. (폴란드전에서 선수 포지션에 그가 준 유일한 변화는 무릎 관절 부상에도 불구하고 전 경기에 출전해온 다마커스 비즐리를 대신해 어니 스튜어트를 기용한 것이 전부다.) 아레나 감독은 "내 본능이 변화를 원했으며 나는 본능을 따르는 부류의 사람이다"며 "아마 코칭 스태프의 의견도 본능을 따르는 나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므로 코칭 스태프도 이를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토요일 밤이 되자 아레나 감독은 그의 본능을 따르기로 결심했고 멕시코전에 새로운 선수들을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의 내면의 목소리는 지난 수년간 그를 충실히 보좌해 왔다. 1999년 컨페드컵에서 높은 고도와 지나치게 빡빡한 경기일정은 아레나 감독으로 하여금 대표팀을 2개로 나누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효과를 봤다. 번갈아 휴식을 취한 미국의 분리된 대표팀은(시제이 브라운, 매트 맥코언, 리치 윌리엄스, 그리고 파울 브라보같은 선수들이 맹활약한) 독일을 2-0으로 물리쳤다. 그리고 미국은 멕시코, 브라질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99년 대회에서 아레나 감독은 국제적인 경기에서도 모험을 감행하는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첫번째 증거를 보여줬다. 게다가 그는 변화를 시도할 때마다 그가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기억하는가? 98년 월드컵에서 이란에 2-1로 진 경기에서 새로운 스타팅 멤버 5명을 기용한 스티브 샘손 감독은 패배한 뒤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그와 아레나 감독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아레나 감독은 과장이 아닌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그의 선수들에게 변화된 전략을 이해 시킬 수 있었다.

미국팀의 수비수 에디 포프는 "그의 이런 점이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또 포프는 "98년 대표팀의 선수들은 포지션과 관계없이 산만한 움직임을 보였고 이 점은 선수들의 태도와 함께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아레나 감독은 부임 즉시 팀의 유기적인 조직력이 앞으로 미국 팀의 첫 번째 목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 팀은 선수 모두가 서로를 믿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선수가 기용돼도 쉽게 적응할 수 있으며 옆에서 함께 뛰게 되는 동료를 신뢰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주 금요일 펼쳐질 대 독일전에서는 과연 어떤 선수가 스타팅 멤버로 기용될까? 누가 알겠는가? 아레나 감독이 화요일 기자들에 밝힌 바처럼 그는 독일전 스타팅 멤버를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독일은 똑같은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대단한 일이 펼쳐질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아레나 감독이 해온 거의 모든 일들은 환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Grant Wahl (CNNSI) / 박치현 (JOINS)

◇ 원문보기 / 이 페이지와 관련한 문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