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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생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한탄하고 나선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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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대한민국에서 더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용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하게 심판받는 그날까지, 이화가 지켜보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일부 일간지 1면에 난 광고문구다. 광고 주체는 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 일동이며, 자발적 모금으로 게재했단다. 이 광고는 2002년 이종사촌 오빠의 장모인 모 기업 회장 부인 윤모씨에 의해 청부살해된 한 이대생의 억울한 죽음과 이후 사법당국의 처리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당시 청부살인 교사로 무기징역이 선고됐던 윤씨가 알고 보니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한 병원 특실에서 호의호식해 왔다는 사실이 분노의 진원지였다. 이 사실은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사모님의 이상한 외출’을 통해 알려졌다.

 사건 발생 시점부터 지금까지 11년간의 궤적을 보면 마치 드라마 ‘돈의 화신’ 번외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요즘 다시 관심을 모으는 과거 피해자 아버지의 편지에 따르면, 회장 사모님은 7억원을 주고 판사 사위를 들이고, 사위의 불륜을 의심해 엉뚱한 이종사촌 여동생을 청부살해하고, 재판에선 엄청난 법무법인을 동원해 방어에 나선다. 이에 피해자의 아버지가 해외로 도망친 청부살해범을 수소문해 잡아오는 등 고군분투한 끝에 마침내 윤씨의 무기징역을 이끌어낸다.

 대부분의 드라마는 이 즈음에서 ‘정의는 마침내 승리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끝난다. 그런데 현실의 드라마엔 한 끗이 더 있었다. 무기징역을 받은 회장 사모님은 검찰과 의사의 도움으로 손쉽게 형집행정지를 받아내고, 바깥에서 부족함 없는 생활을 향유한다. 그러다 ‘재수없게’ 6년여 만에 방송에서 취재를 하는 바람에 들통이 나고, 검찰은 방영 직전에야 형집행정지를 취소했다.

 이 와중에 이화여대생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는 ‘서먹한 광경’이 펼쳐졌다. 광고운동을 벌였던 학생과 통화를 했다. “우리 국민 상당수는 ‘유전무죄…’를 외치는 이대생이 낯설 거다.” 내 말에 학생은 말했다. “우린 옳지 못한 법 집행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거다. 그나마 피해자는 능력 있는 부모님이 계셔서 이 일이 조명됐다고 본다. 우리 사회엔 정당하지 못한 법 집행 관행이 존재하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억울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시민들이 진실규명을 요구하고 사법당국의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 피해자가 동문이었으므로 누군가 행동해야 한다면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광고운동을 제안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재학생은 몇천원부터 졸업생은 몇십만원까지 1700여 건을 입금했다고 그는 밝혔다.

학생들이 법 집행의 공정성을 믿지 못해 용돈을 털어가며 정당한 법 집행을 요구하는 나라. 바로 대한민국 오늘의 모습이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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